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터의 고뇌》 논평
*2024년 1학기 서울대학교 '문학과 철학의 대화' 수업의 과제문입니다.
사랑은 일종의 강렬한 체험이고, 그런 점에서 종교와 닮아 있다. 묵묵부답의 신에게 끊임없이 기도하는 종교인처럼 베르터는 로테에게 일방통행의 사랑을 끊임없이 노래한다. 베르터가 로테를 끊임없이 천사에 비유한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 하다. 또한 베르터에게 사랑은 삶의 내용일뿐만 아니라 삶의 구조이자 형식이라는 점에서 종교와 닮아 있다. 종교적 인간은 단지 주말에 교회나 절에 가는 것을 넘어서 삶 전체의 형식에 종교성이 깃들고, 신앙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베르터도 사랑으로 인해 삶을 마감한다. 만약 사랑이 삶의 구조이자 형식이 아니라면 사랑으로 인해 삶을 마감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어떻게 삶의 내용물이 삶 바깥에 있는 죽음을 희구할 수 있겠는가? “인생이 한바탕 꿈과 같다”(21)던 냉소적인 베르터가 로테에게 반하고 온갖 희노애락의 파도를 겪는 체험은, 그 인생의 각 장면이 바뀌는 순간일 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의 장르가 바뀌는 일이기도 하다. 마치 무신론자가 한순간의 신비체험을 통해 열렬한 종교인이 되듯, 사랑이라는 신비한 체험은 인간을 뒤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이 체험은 보편적으로 경험하고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개인적이고도 사적인 체험이다. 이것은 체험이라는 인간 활동의 근본적인 속성이다. 소주의 맛을 아무리 말로써 잘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애인에게 차이고 홀로 들이키는 소주의 맛은 직접 체험을 통해 마셔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사랑이 우리에게 어떤 앎을 준다면, 사랑의 온전한 앎은 오직 체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베르터는 로테를 만나기 전부터 이것이 사랑의 본질임을 알았던 것 같다. 베르터는 사랑에 빠진 머슴의 말을 듣고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통해” 보는 것과 달리 자신의 눈을 통해 여주인을 보는 것은 그 아름다운 모습을 망치는 일이라 말하기 때문이다.(31) 사랑의 체험자 자신이 아니라면 그 사랑의 진면목을 포착할 수 없다는 언명이다. 이렇게 사랑은 삶의 형식을 뒤흔드는 체험이며,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개인적 체헌이라는 것을 안다면, 베르터의 사랑이 일견 ‘예쁘고 교양 있는 (예비)유부녀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보이는 것도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당신은 베르터가 아니므로 그렇게 보여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사랑의 당사자에게는 다르다. 죽음을 희구하게끔 하는 체험은 보통 예사롭지 않다. 베르터에게 사랑이 죽음의 이유가 되었듯, 누군가에게는 삶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만약 베르터도 그를 가로막는 현실적인 장애물들이 없었다면 그의 사랑은 오히려 삶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랑을 체험하는 이에게는 무엇을 콕 가리켜 그것을 사랑이라 말할 수 없다. 이미 사랑은 삶의 형식이 되어버렸기에, 삶의 그 어떤 내용물도 그것을 제대로 가리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느냐고? 나는 이 말을 죽도록 싫어한다. 로테는 나의 모든 감각, 모든 느낌을 채우고 있는데..”(60) “저더러 생각해달라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아도 이미 생각하고 있는데! 아니, 생각할 필요조차 없어요! 당신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으니까요.”(147) 그러니 마치 신비주의 교파의 부정신학(否定神學;theologia negativa)에서 말하듯 이렇게밖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이란 그것이 아니라고. 마음에 쏙 들더라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콧소리 섞인 목소리로 ‘여보’ 하고 느끼하게 서로를 부르더라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천년의 발정이 끓어오른다고 해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소유욕과 집착이 샘솟더라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이 사랑의 일면일지 모르지만, 바로 그것이 사랑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