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갈등 2년 만에 남편과 부모님이 다시 만났다.
2년 간의 공백을 깬 건 다름 아닌 10분의 통화였다.
오늘 친정 부모님을 뵀다. 지난 2년 동안은 혼자서 아이들을 데리고 부모님을 뵀었는데, 오늘은 혼자가 아니었다. 이런 날이 찾아오기를 얼마나 바라왔었는지 모른다. 오랜만의 장인, 장모님과의 만남에 긴장하는 남편 옆에서 자꾸 히죽히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남편과 부모님이 왕래하지 않던 2년의 기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둘째를 임신하고, 출산하고, 또 셋째를 임신했던 것도 다 그 기간 동안 있던 일이었다. 2년 간 네 번의 명절, 네 번의 부모님 생신, 두 번의 어버이날 등 매 행사를 혼자서, 그것도 홀몸도 아닌 상태로 아이들을 데리고 부모님을 찾아뵙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체력적인 피로보다도, 완전체 가족으로 참석한 동생네와 비교되는 내 처지에 대한 통탄스러움이었다. 스스로 나 자신이 시댁에서는 이방인, 친정에서는 이혼녀 같았기 때문이었다. 분하고 원망스러운 날도 많았지만, 장서갈등이 우리 가정의 평화에 영향을 주는 건 원치 않았다. 남편은 부모님에게는 C급 사위였을지 몰라도, 나와 우리 아이들에게는 A급 배우자이자, 아빠였기 때문이었다.
남편과 부모님이 절연한 후 약 1년 간 심리상담센터를 다녔다. 당사자인 둘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그 중간에 껴있는 나는 피가 철철 흐르고, 온몸에 멍이 든 것처럼 아팠다. 가운데에 끼어 양쪽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실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정확히는 중간에서 뭘 하려고 하면 상황만 더 악화될 뿐이었다.
상담선생님은 시간이 약이라고 했다.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색을 변하기 때문에 일단 각자의 시간을 보내라고 했다. 선생님 말씀이 맞았다. 활화산 같이 붉게 타오르던 분노의 감정도 시간이 지나니 점차 무채색으로 옅어졌다. 나도, 남편도, 부모님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지나 부모님은 다시 사위를 보고 싶어 했다. 그 감정이 정말 순수한 그리움인지, 사위와 함께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에서 비롯된 결핍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모님은 '가족끼리 싸우고 화해하면서 지내는 거 아니겠냐'며 내게 남편과 부모님의 화해를 주선하라고 했다.
하지만 남편의 입장은 달랐다. 남편도 시간이 지나니 부모님에 대한 분노의 감정은 없었지만, 다시 만난다는 거에는 '굳이 왜?'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남편은 처갓댁과 다시 만나면 똑같은 일이 또 벌어질 거라고 했다. 그는 장인, 장모님과 안 만나는 지금 생활에 매우 만족하는 것 같았다.
남편의 완강한 태도에 나도 점차 관계 개선에 대한 희망을 잃어갔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간 다시 함께 웃으며 만나는 날이 올 거야'라고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관계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내 옆에 남편이 함께 있어줄까?' 하는 불안이 싹텄다.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이 보인다고 했던가, 얼마 전 엄마가 내게 울면서 전화를 걸어왔다. 큰 사위가 너무 보고 싶다는 거였다. 시간이 지나니 지난날 좋았던 기억이 떠올라 가슴 벅차게 그립다고 했다. 엄마의 울음소리에 마음이 아팠지만, 나를 통해 전하는 엄마의 마음은 그에게 온전히 닿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에게 직접 사위와 전화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엄마에게 전화해 보라고 말씀은 드렸지만, 그래도 실제로 전화하실 줄은 몰랐다. 엄마는 자존심이 매우 강해 아랫사람에게 먼저 고개 숙여 사과하는 걸 수치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마는 다음날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통화 당사자가 아니라 정확한 통화 내용은 모르겠지만, 엄마의 말에 따르면 엄마는 2년 만에 듣는 남편의 "장모님" 소리에 감정이 복받쳐 하염없이 울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의 다시 보고 싶다는 말에, "울지 마세요, 장모님. 집 치워놓고 있을게요"라는 대답으로 오늘 만남이 성사됐다고 했다. 통화내용을 전해 들으며 나까지 눈물이 났다. 용기 내 먼저 사과해 준 엄마도, 엄마의 마음을 따뜻하게 안아준 남편 모두에게 너무 고마웠다.
골이 워낙 깊어 앞으로 매워지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골이 얼마나 깊든 그 골을 메꾸는 건 결국 당사자간의 진심 어린 사과와 용서였다. 그렇게 2년 전 멈춰버린 우리 가족의 시계는 10분의 진심 어린 통화로 다시 또각또각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