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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연 Mar 26. 2024

아빠가 소방관이면 생기는 일

안전민감증 아빠와 안전불감증 엄마

나도 소방관 될래


요즘 4살 큰 아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어린이집에서 소방관에 대한 걸 배웠는지 집에 오면 맨날 불이 났다고 하고, 불을 끄는 시늉을 하고 다닌다. 어제는 소파, 오늘은 동생 침대에서 불이 났다. 용감한 4살 꼬마 소방관은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기다란 물건을 잡고 불을 끈다. 어제는 주걱, 오늘은 빗으로 불 속에 갇힌 인형 친구들을 구했다.


혼자 소방관 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귀여워서 웃음이 나오는 엄마와 달리, 실제 소방관으로 일하는 아빠의 얼굴은 근심이 가득하다. "소방관 하지 마~ 소방관 힘들어~"


<소방관 아내로 산다는 것>에 이어 이번에는 아이 입장에서 아빠가 소방관이면 생기는 일에 대해서 적어보려 한다. 그동안 특정 부분에서 극성스러운(?) 남편을 보며 우리 집만 이러고 사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남편이 소방관인 많은 집이 우리와 같은 일들을 겪고 있었다. 이럴 수가! 남들은 모르는, 소방관 가족만 아는 우리네 이야기를 이곳에 살짝 풀어볼까 한다.




언제나 불안한 소방관 아빠


소방관 아빠는 안전민감증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뉴스에서 한 번 볼까 말까 한 무서운 사고들을 그들은 매일 보고 지내기 때문이다. 그에게 세상은 너무나도 불안하고, 위험한 공간이다.  


엄마의 부주의로 팔팔 끓은 물에 심각한 화상을 입은 3살 아기, 차에 치여 뇌가 터지고, 몸이 잘려나간 시체들, 에스컬레이터에 발이나 손이 끼여 괴로움에 울부짖는 아이들, 창틀에 몸을 기대다가 아파트 고층 높이에서 떨어진 사람 등 보통 사람들은 차마 눈뜨고 볼 수도 없는 그 끔찍한 사고 현장의 날 것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소방관이다.  


남편 말에 따르면 그는 주전자에 물이 끓여지고 있는 모습만 봐도 무서운 생각이 든다고 한다. 우리에겐 그저 믹스커피의 물을 따라주는 주전자가 그에게는 아이를 해치는 흉기처럼 보인다고 했다. 평소에도 안전에 신경을 많이 썼던 그는 아빠가 되고부터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자신이 언제까지나 아이들 옆에 있어줄 수 없다는 불안감에 괜히 나와 아이를 향한 잔소리만 늘어낸다.


아이랑 있을 때는 인덕션 안쪽에서 요리를 해

아이 옆에 있을 때 뜨거운 거 절대 들고 있지 마

횡단보도 건너야 하는 곳은 웬만하면 가지 마

안전벨트는 꼭 해야지! 너무 위험해!

버스? 아이랑 버스를 탄다니 제정신이야?


아이에게 아빠는 '안돼 맨'이다. 뭐만 해보려고 하면 꼭 "안돼, 안돼, 위험해"라고 하며 한창 '내가 할래 병'에 걸린 4살 꼬마 공주의 도전 의지를 꺾고 초를 친다. 그러다 보니 아이는 아빠랑 재미있게 놀다가도 마지막에는 꼭 "아빠 나빠!" 하며 삐치거나, 눈물 콧물 쏙 빼며 세상 서럽게 운다.


부부 사이는 또 어떤가? 만약 안전민감증인 사람끼리 결혼했다면 서로의 불안을 이해하고, 같은 편에 서서 아이의 위험 행동을 제지할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남편은 아이의 자율성과 도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경험 지향 안전불감증 아내와 결혼했다. 안전민감증 남편과 안전불감증 아내, 우리는 요새 아이의 첫 도전을 두고 치열한 언쟁을 벌인다.




버스 타는 게 뭐가 위험해?


요새 첫째는 버스가 주인공인 '타요'만화에 빠져 버스만 지나가면 타고 싶다고 난리다. 주변 친구들도 한 번씩은 다 타봤다길래, 조만간 아이와 함께 버스를 타고 동네 투어를 할 생각이었다. 물론 아빠에게 이 계획을 들키기 전까지 말이다. 아이와 버스를 타겠다는 말에 남편은 노발대발 흥분을 했다.


"버스를 타겠다고? 제정신이야?"


버스에는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하는 안전벨트도 없어, 혹시나 버스에 자리가 없으면 아이와 서서 갈 거야? 만약 버스가 급정거하면 몸이 앞으로 쏠릴 텐데, 그때도 아이를 케어할 수 있겠어? 정 버스를 태워주고 싶다면 버스정거장에 가서 멈춰있는 버스를 타보게 해. 움직이는 버스는 정말 위험해!


듣다 보면 다 맞는 말이라서 심술도 났다. '한 두 정거장만 타는 건 괜찮지 않을까? 관심 있을 때 최대한 많은 경험을 시켜주는 게 아이 뇌발달에 좋대'와 같은 소리는 남편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남편의 이유를 듣다 보니 생각보다 버스가 위험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 후로도 몇 번의 치열한 논쟁 끝에 버스는 아이가 흔들리는 버스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을 때 태우기로 의견을 합치했다.


남들에게는 '그게 왜?'라는 사안들이 우리 부부에게는 논쟁의 씨앗이 된다. 최근에는 횡단보도를 건너도 되는지에서도 의견을 나눴다. 남들은 횡단보도 건너는 게 왜?라고 그러겠지만, 남들보다 불안도가 높은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연습을 해야 하는 이유와 안전에 대한 대비책을 설명해야 한다. 이런 문제로 부딪히는 게 하도 많다 보니, 나의 논리력은 날로 일취월장이다.


위험하다고 언제까지고 횡단보도를 건너지 말라고 할 수는 없어. 그리고 혼자 건너겠다는 게 아니고 엄마인 나랑 함께 걸으니 괜찮아. 함께 건너면서 횡단보도 건너기 전 좌우를 살피는 연습, 손들고 걷는 연습 등을 해야지 나중에 더 안전하게 보행생활을 할 수 있어.


그의 불안감이 다 떨친 것 같진 않았지만, 그는 내 의견에 동의했다. 안전 보행을 위한 주의사항 백만 개쯤 들은 후 나와 아이는 횡단보도를 건너서 갈 수 있는 과일가게까지 갈 수 있게 됐다.




내 주변 지인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 정말 피곤하게 산다고 한다. 맞다. 나 정말 피곤하게 사는 것 같다. 세상에 우리 집보다 자녀 안전에 대해 이렇게 치열하게 논쟁하는 집이 있을까? 그런데 한때 소모적이라고만 생각했던 이 논쟁이 3~4년째 이어지다 보니 뜻밖의 좋은 점도 있었다. 그건 바로 우리 부부의 변화였다.


우리는 아이의 안전을 논하면서 스스로의 틀을 깨고 있었다. 안전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세워둔 높은 불안의 벽에 갇힌 남편은 나와 논쟁을 하며 그 불안에서 한 발짝 멀어져 가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안전에 대해 별생각이 없던 나는 남편과 안전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안전의 중요성을 머리와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최근 남편이 일이 있어 1박 2일 집을 비운 적이 있었다. 나가는 남편을 붙잡고 혹시 아파트에서 불나면 어떻게 해?라고 물었었다. 얼마 전 화재경보기 오류로 아파트 전 세대에 경보음이 크게 울린 적이 있었는데, 남편 없을 때 진짜 불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진지하게 표정을 바꾸고는, 먼저 문을 살짝 열어보고 연기가 자욱하면 젖은 수선을 문턱에 끼워놓고, 아이들 데리고 보일러실로 숨으라고 알려줬다. "밖에 연기가 자욱하면 집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해"라며 말하는 그. 소방관 아빠, 소방관 남편이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화재상황 발생 매뉴얼을 확신에 차서 말해줄 수 있을까. 세상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걱정을 화내면서 하고, 사랑은 잔소리로 표현하는 아빠라 낯간지러운 말을 좋아하는 4살 딸아이와는 만날 때마다 티격태격하지만, 아빠를 끔찍이 사랑하는 딸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랑스럽게 "우리 아빠 소방관이에요!"라며 말하며 으쓱해한다.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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