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창구 안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문해력 테스트
일 년 평균 30권 이상의 책을 읽고, 매일 한 시간씩 글을 쓴다. 주변에서 말주변이 좋다는 말도 많이 들었고, 글이 이해가 안 된다는 사람들을 도와 글을 해석해 준 것도 여러 번이었다. 글 쓰고 읽는 게 직업인 사람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스스로 문해력이 낮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동주민센터 민원창구에 들어오기 전까진 말이다.
"이 서류에는 인증과 증지를 찍어야 해요"
"서류가 두 장 이상이면 천공 처리해야 해요"
"잘 못 나온 서류는 서손 처리 하세요"
"잘 못 썼으면, 삭선하고 다시 쓰세요"
요즘은 한자 사용이 거의 없다고 하는데, 동주민센터에선 예외였다. 체감상 민원 업무의 80%가 한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업무 인수인계를 받는데, 업무의 내용보다 주임님들이 당연하다는 듯 사용하는 용어들이 더 귀에 걸렸다. 공식 문서임을 알리는 '인증', 수수료를 냈다는 뜻의 '증지', 위에 구멍을 낸다는 '천공', 잘 못 인쇄된 문서를 무효처리 하라는 '서손', 고치는 선 '삭선', 쉽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선 이게 공식 언어였다.
민원처리 중에서도 한자는 불시에 툭툭 튀어나왔다. 전입신고 시 세대주와 신청인의 관계코드를 지정해야 하는 데, 이 코드만 100여 가지가 넘었다. 남동생이 누나집에 와서 살면 제(弟), 여동생이 언니집에 와서 살면 매(妹)와 같이 같은 동생이라 하더라도 성별에 따라 관계를 설명하는 한자가 달랐다.
사실 제와 매는 쉬운 편이었다. 어느 날엔 세대주의 외숙모라는 분이 전입신고를 하러 오고, 어느 날엔 삼촌 집에 들어가 살겠다는 조카가 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민원인이 보이지 않게 모니터 뒤편에 숨어 전입신고 화면창의 스크롤바를 한참을 내렸다. '외숙모와 조카를 한자로 뭐라 하더라...' 뒤적거리며 말이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소장 송달이 안 돼 원고가 법원에서 주소보정명령서를 들고 피고의 초본을 떼러 온 민원이었다. 창구 안으로 신청인의 신분증과 주소보정명렁서를 전달받고, 피고의 초본을 떼어주려는 데 주소보정명령서 두 번째 페이지에 '등본입니다'라는 문구가 보였다. 평상시에는 그냥 뒤로 넘기던 서류였는데, 그날따라 '등본'이라는 말이 왜 이리 크게 보였는지 모르겠다.
등본도 필요하세요?
창구 안에 있는 공무원이 너무나 당연하게 등본도 필요하냐고 물어보니, 민원인분은 적잖이 당황해하시며 '등본 얘기는 못 들었는데, 한 번 확인해 볼게요...'라며 돌아가셨다. 민원인이 가고 나서 알았다. 송장명령서의 '등본입니다'는 주민등록등본의 그 등본이 아닌, '원본이 아닌, 공식 사본을 의미하는 용어'라는 걸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수치스러워 손이 덜덜 떨린다.
민원대 공무원을 문맹으로 만드는 건 한자뿐만이 아니었다. 임대차신고를 할 때 주택 유형은 어찌나 그렇게 많은지. 다가구주택, 다세대주택, 연립주택, 빌라는 얼핏 보면 다 비슷해 보이는데, 소유주가 한 명이냐, 여러 명이냐, 4층 이상의 건물이냐 아니냐에 따라 카테고리가 달라졌다. 내가 만난 민원인의 대부분은 본인이 사는 곳이 다세대인지 다가구인지 몰랐다. 그런데 여기서 공무원까지 이 차이를 모른다면? 그야말로 대환장 파티가 벌어지는 것이다.
구청에선 자신이 맡은 업무만 숙지하면 됐었는데 민원대는 달랐다. 내가 지난 두 달간 겪은 민원대는 삶을 통틀어 배운 생활 상식과 지식, 그리고 지혜가 필요한 곳이었다. 내가 민원인일 때 겪었던 경험의 양과 질에 따라 내 맞은편에 앉아있는 민원인을 이해하는 폭도 넓고 깊어졌다. 민원대엔 주론 신규공무원이나 하급 직급 공무원들이 앉아있어 업무 내용이 단순하고 쉬울 거라 생각했었는데, 오산이었다.
그러다 보니 공무원에게도 민원대 용어들이 어려운데, 동주민센터 주 고객인 어르신들은 오죽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신청서를 드리면, 절반 이상은 "이게 무슨 말이에요?"라고 되물었다. 자신의 이름도 한자로 못 쓰는 사람이 대한민국 절반 이상이라는데, 신청서류는 어쩜 그렇게 한자어로만 구성되어 있는지. 창구 안에 있으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어디서가 전문가와 고수의 차이를 비교한 글을 본 적이 있었다. 전문가와 고수 둘 다 실력은 엇비슷하게 출중하지만, 고수는 어린아이가 들어도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럼 민원대에서 고수는 누구일까? 창구밖에 있을 땐 서류를 빨리 발급해 주는 사람이라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민원 누가 와도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는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급 공무원인 난 신청서식을 바꾸진 못한다. 게다가 이미 마르고 닳도록 서류를 발급해 온 선배님들의 서류 발급 속도를 따라가지도 못한다. 하지만 이중 가장 최근까지 창구 밖에 있던 사람으로서, 민원인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민원인들에게 가장 쉽게 설명하는 공무원이 되기로 했다. 민원인의 눈높이에서 어떻게 쉽게 설명할까 노트를 끄적이고 있는데, 옆에서 깊은 한숨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옆 주임님께서 전체가 한자로 빼곡히 쓰인 호적등본에서 민원인의 이름을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그렇게 우린 창구 안에서 매일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매일 조금씩 똑똑해진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