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인에게 웃고, 민원인에게 무너졌다

칭찬 한 줄과 폭언 한 마디 사이에

by 심연

흔히 동주민센터 업무의 고충을 이야기할 때면 악성민원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막말, 고성, 억지, 때로는 폭행까지 이어지는 이 4종 세트가 민원대 공무원을 병들게 하는 원흉이라는 것이다. 내가 처음 동주민센터 발령 소식을 전할 때, 주변에서는 모두 같은 걱정을 했다. '민원대 힘들 텐데, 이상한 사람도 많다잖아.'


하지만 주변의 우려와 달리 최근 한 달간의 내 민원대 생활은 꽃동산에 봄소풍 온 꼬마 아이와 같았다. 업무를 몰라 긴장했던 시기도 잠시, 반복된 업무에 자신감이 붙자 점점 표정이 밝아지고 목소리도 커져갔다. 2년 반 동안 집에서 애들 얘기만 듣다가, 밖에 나와 어른들 사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별 거 아닌 일도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또 작게나마 내가 그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도 일상에 큰 성취감을 안겼다.


물론 종종 이상한 사람들이 오기도 했다. 대뜸 동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어 서류를 사진 찍어 보내달라는 사람, 열 손가락 지문 인식이 모두 실패하자 자신이 범죄자냐며 소리치는 사람, 자신이 전 통장이니, 전 주민자치회장이니 하며 특혜를 바라는 사람 등. 그분들은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공무원들이 자신 앞에서 쩔쩔맬수록,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할수록 그분들의 언행은 더 과격해졌고, 더 우쭐해했다.


언제 한 번 옆창구에 머리가 새하얗게 새신 할머니가 오셨다.(보통 어르신, 선생님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분의 행동은 어른과는 정말 거리가 멀었으니 그냥 할머니라고 표현하겠다) 전화로 등본을 찍어 보내달라고 했다가, 안 된다고 하자 친히 동주민센터까지 귀한 발걸음을 해주신 VIP민원님이셨다.


"여기 있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분은 필요한 서류를 다 받았음에도 자신을 동주민센터까지 오게 한 공무원이 괘씸했는지, 일이 끝나도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곤 그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막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아니, 그 말들을 다시 떠올려보니 배설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어쨌든 그분은 입으로 배설물을 싸질러놓고 홀가분히 동주민센터를 떠났고, 그 오물을 그대로 뒤집어쓴 선배 주임님은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언제 한 번 선배에게 "왜 참으세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같이 막말로 응수할 수도 있고, 경찰을 부를 수도 있고, 녹음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선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들리는 척, 아무것도 안 보이는 척, 그렇게 선배는 자신의 책상에 놓인 서류만 바라보며 막말을 무시로 응수했다.


선배는 무시가 가장 빠른 해결책이라고 했다. 할 말만 하고 떠날 테니, 무시는 상황을 가장 빠르게 정리할 수 있는 최선이라 했다. 하지만 난 이해되지 않았다. 그분은 제 할 말 다하고 떠났더라도, 그 안에 남아있는 사람은 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준비도 없이 오물을 뒤집어쓴 그 뭣 같은 기분은 하루가 지나도 해소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차라리 같이 욕을 하지, 그럼 마음이 지금보단 나을 텐데..', 강 건너 불구경이라고 했던가, 제삼자였던 난 그 상황에서 가장 이성적인 사람 중 하나였다. 내게 만약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겠다 다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상상은 현실과 달랐다. 직전 민원인에게서 "정말 친절하세요!"라는 감사인사를 받은 직후였다. 번호표를 눌렀고, 그분이 내게 걸어왔다. 팔자걸음에 잔뜩 신경질이 난 얼굴, 거적때기 외투에, 잔머리가 잔뜩 삐져나오게 묶인 머리. 그분의 모습은 전에 선배에게 오물을 뿌리고 간 할머니의 인상과 비슷했다. 심술궂은 두꺼비상, 악성민원인의 관상이었다. 그분이 내게 다가올수록 내 심장은 더욱 빠르게 진자운동을 시작했다. 쿵쿵쿵, 온몸의 세포가 삐죽 서는 느낌이었다. 방어기제 때문이었을까, 그녀에게서 낯선 경계심이 들었다.

미과세 증명선가? 그거 남편 걸로 떼어줘


반말에 정확하지 않은 서류 명칭, 그리고 계속 중얼거리며 툴툴거리는 어투, 그분의 정체는 내 예상대로 악성민원인이 맞았다. "미과세 증명서 어떤 거요?" 하며 정확한 서류 명칭을 묻자, 그분은 미과세 증명서면 미과세 증명서지, 왜 자신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지 못하냐며 화를 냈다. 스무고개도 아니고... 국세 납세증명서도, 지방세 납세증명서도 아니었다. 순조로운 동주민센터 안에서 우리 창구만 유독 삐그덕 거렸다.


나 : 배우자 서류를 뽑으려면 위임장 작성이 필요해요. 서류드릴 테니 작성해 오세요.

민원 : 뭐? 집에 갔다 또 오라고? 서류 줘봐. 내가 여기서 쓸게.

나 : 안 돼요. 위임자가 써야 위임장이죠. 선생님이 쓰시면 신청서잖아요.

민원 : 별 미친*을 다 보겠네. 구청에서도 내가 직접 위임장 써서 발급받았어. 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지금도 구청 가면 바로 받을 수 있어. 내가 다리가 아파서 여기로 온 거야.


무슨 객기였을까. 평소라면 선배 주임님들께 한 번 더 확인하고 민원을 응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땐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의 말에 꺾이고 싶지 않았다. 선배처럼 묵묵히 참고 싶지 않았다. "그럼 거기 가서 받으세요.", 순간 동주민센터가 조용해졌다. 당당히 제 할 말 다 하던 그분도 '이 미친놈은 뭐지?"란 표정으로 날 멍하니 쳐다봤다. 그렇게 3초, 정확히 3초 뒤 그 사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람도 시한폭탄처럼 펑하고 터질 수 있구나를 그때 다시 깨달았다.


"동장 나와"부터 시작해, 별의별 상스러운 욕설이 그 공간을 가득 채웠다. 별 같지도 않은, 잘 알지도 못하는 자격미달 인간이 공무원이라며 내 앞에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막말을 퍼부었다. 그렇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잘 알지 못하는 건 내가 아닌 그 사람이고, 그 사람은 지금 안 되는 걸 되게 해 달라고 욕설로 때를 쓰는 중인 거니 그 사람이 던지는 말에 내가 상처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선배가 내 뒤로 달려와 "위임장은 본인이 직접 안 써도 돼"라며 속삭였다. 세상에, 그 말을 듣자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이 났다. 동장 나오라고 소리치는 모습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는데, 선배의 그 작은 속삭임이 날 주저앉혔다. 민원인 말이 맞고, 내 말이 틀렸다는 게 큰 자괴감을 안겼다. 작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발급해 드릴게요..."라고 말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행정처리를 잘 알지도 못하는 자격미달 공무원', 민원인의 폭언은 망상이 아닌 팩트였다.

민원인이 돌아가고 난 자리, 선배들은 내게 잠깐 밖에 나가 쉬고 오라며 등을 토닥였다. 찬 바람에 눈물을 식혔다. 동주민센터 주위를 서너 바퀴 돌면서 빨갛게 부어오른 눈을 가라앉힌 뒤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센터 안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했다. 순번대기표에 대기 인원이 쌓여가는데, 번호표를 누르기 무서웠다. 재밌게만 들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 이웃 같아 정겹기만 했던 민원인의 얼굴들이 이제 더는 반갑지가 않았다. 무서웠다. 혹시 또 내가 모르는 게 있을까 봐, 또 누가 내게 삿대질을 할까 봐 겁이 났다.


그때 메신저 창이 깜빡였다. 방금 일어난 상황을 모르는 2층에 있는 서무주임이었다. "주임님 축하해요! 칭찬 민원 들어왔어요." 그리고 '구청장에게 바란다' 게시판에 올라온 투박하지만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쓴 글을 캡처해 보내줬다.


Re. 제가 더 감사합니다 ㅠㅠㅠ

'직위는 모르고 OOO 직원입니다. 인감증명서를 발급받으러 OO동 주민센터를 방문했는데, 발급해 주면서 다 헤어진 인감보관 주머니를 보고 새것으로 교체해 주어 너무 감동했어요. 교육의 효과로는 거둘 수 없는 타고난 착한 인성 같아요. 구청장님의 솔선수범은 물론이고요. 이런 직원이 있는 한 구청장님은 4선, 5선도 제가 밀어드리죠. 높이 칭찬합니다. 많은 직원 앞에서 칭찬해 주세요'


밖에 나가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왔는데, 그 글을 보자 또 울컥 마음이 요동쳤다. 민원인에 웃고, 민원인에 우는 삶, 이게 동주민센터 민원대 공무원의 삶인가 보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번호대기표를 눌렀다. 띵동 소리와 함께 걸어 들어오는 민원인을 향해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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