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잠든 사이, 누군가 당신의 초본을 떼고 있다

개인정보는 생각보다 쉽게 열람된다

by 심연

창구 밖에 있을 땐 개인의 등초본은 본인이나, 본인의 허락을 받은 사람만 발급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주소와 주민등록번호, 가족의 개인정보까지 담긴 기밀자료니,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35년 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 믿음이 창구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보기 좋게 와르르 깨졌다.


"부모와 자식간에는 본인의 위임 없이도 서로의 등초본, 가족관계증명 발급 가능해요


민원대에 와서 '엇? 이거 이래도 되나?'싶었던 순간이 여러 번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직계존비속 간에는 당사자의 동의가 없어도 상대의 등초본을 발급받을 수 있다는 거였다. 세상엔 남보다 못한 가족도 많은데, 동주민센터 안에서 혈연은 여전히 위임장을 생략할 만큼 진하고 끈적했다.


이 사람들 초본 발급해 주세요.


민원대에 앉은 지 일주일 정도 됐을 때, 멋지게 정장을 빼입은 중년의 남성분께서 꽤 두터운 서류를 들고 오셨다. 그 서류 안에는 스무 명의 개인정보와 함께 미납된 통신요금과 신용카드대금이 적혀있었다. 적게는 십여만 원에서 많게는 삼천만 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돈도 피만큼 진하다 했던가, 생판 모르는 제3자도 돈이 얽히면 친족만큼 가까운 사이가 됐다. 돈을 갚지 않으면 채권 추심을 위해 신용정보회사에서 초본을 떼가고, 송장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면 원고는 동주민센터에 와 피고의 집주소를 알아갔다. 별 거 별 거 다 떼어주는 동주민센터는 서류뿐만 아니라, 떼인 돈까지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었다.


스무 명의 채무자 초본 발급을 요청한 신용정보회사 직원분은 내일 찾으러 오겠다는 말만 남기곤 서류를 두고 나가셨다. 민원이 없을 때마다 틈틈이 초본을 출력했다. 그러던 중 옆 창구에서 괴성이 들렸다.


"그냥 해줘! 이게 뭐 그리 어려워? 편하게 앉아서 내가 낸 세금만 * 받는 *이면서, ****"


삐-삐-, 고성과 억지, 그리고 말의 절 반 이상이 삐-처리가 되는 별들의 향연. 나는 방금 출력된 초본을 내려보다 고개를 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그분들이 오셨다. 동주민센터의 블랙컨슈머, 악성민원이 말이다. 한참의 괴성 뒤 이어지는 정적, 그 정적 속에서 울려 퍼지는 프린트 소리가 그 순간만큼은 유난히 크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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