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되나요? "네, 됩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 초반에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서 어떤 걸 집게 될지 알 수 없어"라는 말이 나온다. 인생엔 우리가 예상하지 못 한 재미난 일이 많다는 뜻의 이 대사는 순번대기표 버튼을 누르기 직전의 동주민센터 민원대 공무원에게도 꽤 들어맞는 비유였다.
순번 대기판 뒤편에 앉은 공무원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민원인들은 대기판에 적힌 숫자만 바라보지만, 그 숫자 뒤편에 앉은 공무원들은 '이번엔 어떤 민원이 올까' 하는 궁금증과 함께 걱정, 불안, 기대, 설렘과 같은 감정을 갖고 버튼을 누른다. 민원을 본 지 얼마 되지 않을 땐 걱정과 불안의 마음이 크고, 민원을 보는 데 자신감이 붙으면 이 과정이 마치 게임하는 것처럼 느껴져 기대되고 설레기도 한다.
주민센터에 출근한 지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민원을 봤다. 그동안 선배들 등 뒤에서 열심히 업무를 배워놨지만, 막상 혼자 민원을 보려고 하니 긴장되고 떨렸다. 창구 밖에 대기 중인 민원인의 얼굴을 살폈다. 대기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핸드폰을 하고 있는 중년의 아저씨, 도우미의 부축을 받으며 복지 창구로 걸어가시는 할머님, 유모차를 끌고 들어와 번호표를 뽑는 아기 엄마 등 주민센터 안에는 서로 다른 얼굴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사정을 가지고 하나둘 모였다.
'무뚝뚝해 보이는 팔짱 낀 분 말고, 그 옆에 있는 착해 보이는 여자분이 오셨으면 좋겠다', 민원인이었을 때도 종종 창구 안에 있는 공무원들을 보며 혼자 선호 창구를 생각하곤 했었는데, 그 습관은 창구 안으로 자리를 옮겨도 여전했다.
쉬운 업무가 나오길 하는 바람으로 버튼을 눌렀다. "띵동" 소리와 함께 순번대기판 속 번호가 바뀌었다. '42번', 그리고 내 앞으로 짧은 검은 패딩에 검은 바지를 입으신 짧고 하얀 머리칼의 어르신이 저벅저벅 걸어오셨다.
농업 경영체 등록 증명서 주세요
'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첫 민원은 등초본 발급 업무길 바랐다. 그런데 생전 처음 들어보는 농업 어쩌고 저쩌고라니. 당혹스러움에 옆 창구를 쳐다봤다. 날 도와줄 구세주를 찾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모든 주임님들은 각자 자신의 민원을 보고 있는 중이었고 날 도와줄 분은 없었다. 식은땀이 났다. 나 혼자 해결해야 할 첫 관문이었다.
난 어르신께 이 서류를 동주민센터에서 받는 거 맞냐며 물었다. 종종 발급처를 착각하여 잘못 오시는 민원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질문이 오히려 당황스러웠던 어르신은 그럼 어디서 받냐며 되묻고는 이게 있어야 비료랑 퇴비를 받을 수 있다는 말씀만 반복하셨다.
그때부터 서둘러 민원 24 사이트에 들어가 찾아봤다. 검색창에 '농업'만 쳤는데, '농업경영체 등록 확인서'가 바로 나왔다. 진짜 동주민센터에서 발급하는 서류였다. 그 서류를 보자 나도 모르게 "진짜 있네!"라며 소리쳤고, 어르신은 두 눈 똥그래져서 쳐다보는 뉴비 공무원을 향해 자기 말이 맞지 않냐며 허허 웃으시며 돌아가셨다.
동주민센터는 단순히 등초본만 떼주는 곳이 아니었다. '이게 있겠어?' 하는 서류까지 다 발급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이후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다양한 서류를 발급했다. 국세 지방세 납세 증명서, 전입세대 열람확인서, 거소사실증명서, 세목별 과세표준서, 소득금액증명서, 병적증명서, 확정일자부여현황, 혼인증명서, 기본증명서, 입양증명서, 건축물대장, 심지어 최근엔 국가유공자 가족 확인증까지 찾아가셨다.
취급하는 서류가 워낙 많다 보니, 서류 신청서 양식도 헷갈리고, 발급 비용도 헷갈렸다. 서류를 발급하고 나면 옆 주임님께 "이거 얼마였죠?"하고 묻는 일이 태반이었다. 민원대 공무원 책상에 하나씩 끼워져 있는 서류별 발급비용 표는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오후 4시경, 이제 민원대 업무가 익숙해지려던 때 말끔히 정장을 빼입은 50대 중년의 남성분께서 두툼한 서류 뭉치를 들고 내 자리로 걸어오셨다. 그분은 익숙한 듯, 서류 뭉치와 자신의 신분증을 툭하고 던지듯 창구에 올려놓으셨다.
"여기 있는 사람들 초본 한 통씩 떼어주세요"
그분이 건넨 서류 상단엔 <금융회사 등의 주민등록표 초본 열람 또는 교부 신청서>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 안엔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의 개인 인적사항과 함께 채무 금액이 쓰여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채권추심을 위해 신용정보회사의 직원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