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복수를 원했던
친절한 금자 씨는
친절해 보일까 봐 두려워했지만
그녀의 친절은, 운명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친절은 최고의 종교다. 복잡한 교리나 실천 강령 따위는 필요 없다. 마주치는 낯선 사람, 직장의 동료들, 자주 가는 상점의 직원들, 출근길에서 만난 사람들, 체육관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루에 하나씩 친절한 행동을 하면 된다.
상냥한 말투로 건네는 인사, 공손한 태도로 인사를 받기, 바빠 보이는 사람에게 먼저 양보하기,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동료 도와주기, 일에 서툰 동료를 말없이 도와주기, 먼저 인사하는 직원에게 친절한 태도로 함께 인사하기 등등. 별로 힘든 일도 아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바보처럼 매일 웃고 다닐 필요는 없다. 사실 웃기 힘든 세상인 건 맞다. 사는 게 팍팍하고 벅찬 것도 맞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지옥이라고 해도 현실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상을 쓰고 불친절할 이유는 전혀 없다.
가슴속에 분노를 가득 담은 채로 씩씩거리며, 지나가는 사람과 시비 붙은 적도 있었다. 불친절한 택시 기사와 욕설을 하며 싸운 적도 있다. 새치기하는 사람에게 거칠게 야단을 친 적도 있다.
내 분노와 슬픔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드러내면 그 분노와 슬픔이 사라질까? 경험에 의하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부정적인 감정들은 더욱더 커져서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사회의 비인간성, 부정의, 불합리, 구조적인 모순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분노가 이성에 의해 통제된 채로 구체적인 실천을 위한 원동력으로 쓰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드시 자기를 파괴하거나 타인을 파괴하게 된다.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자신의 분노를 푸는 행위는 자신의 나약함, 비겁함, 비열함을 나타내는 증표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과 타인을 파괴하지 않는, 실천이 따르는 정당한 분노는 집요하고 끈질기며 융통성이 있다.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분노한다면, 각자 현재 자신이 처한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실천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불친절한 세상에 분노한다면, 내가 타인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된다. 집요하게 끈질기게 타인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식이 도저히 통하지 않는 인간을 만난 경우, 융통성을 발휘할 필요는 있다.)
의리 없고, 인정머리 없는 세상에 분노한다면, 내가 그렇게 살지 않으면 된다.
약속은 천금처럼 여기고 상대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야비한 짓 따위는 하지 않으면 된다. 상대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의 이익에 맞지 않는다고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배신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으면 된다.
사람들의 몰인정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로 화가 난다면, 내가 인정 많은 사람으로 살면 된다. 자신의 능력 안에서 최대한 인정이 넘치는 사람으로 살면 된다.
자선사업가나 종교인이 되어 거창한 일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나에겐 그 정도의 능력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불합리에 분노한다면,
끊임없이 그 모순과 불합리를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면 된다.
끈질기고 집요하게.
세상이 바뀌면 그제야 나도 바뀌겠다고
말하는 건 바뀌지 않겠다는 소리다.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세상 탓만 하며 내가 바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정치를 통해서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미약한 내가 도저히 바꿀 수 없고
어떤 힘 있는 사람만이 바꿀 수 있는 거라 생각했다.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더디고 답답하지만 그래도 세상이 아주 조금씩이라도 바뀌고 있는 이유는, 자신의 현실에서 자신의 분노를 집요하고 꾸준하게 표출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이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 란 생각과
그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나는 무례한 세상에 분노한다.
불친절하고 몰인정한 세상에 분노한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 대한 저항의 수단으로 배려, 친절, 예의 바름 그리고 자상함을 선택했다. 내가 원하는 사회가 그 구성원들이 서로 양보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서로에게 예의 바르고, 서로에게 자상한 사회라면, 내가 그렇게 살면 된다. 마치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가 실현된 것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썩은 물처럼 마음속에 고여 있는 불안, 두려움, 공포, 의심을 모두 쏟아버리면, 그 자리에 용기와 의지가 샘솟는다. 그러면 된 거다. 이제 더 이상 실체가 없는 그런 썩은 물 같은 감정들 때문에 물러서지 말자. 꾸준하고 집요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을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