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
환형동물문 지렁이아강에 속한 생물들의 총칭
어제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여름의 방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 다음날
산책을 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곳곳에 밟혀 죽은 지렁이 사체들이 보인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자주
마주친 녀석들이다
생각해 보니, 녀석들과 조우할 때마다
단 한 번도 녀석들을 밟거나 괴롭힌 적이
없는 것 같다
녀석들이 징그럽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다
어릴 때는 지렁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참 관찰한 뒤 다시 돌려보내 주기도 했다
녀석들에게 소금을 뿌리고 돌로 찍어 죽이고
밟아 죽이던 어린 인간들의 끔찍한 모습이 떠오른다
인간은 역시....
지표면 위에 아스팔트나 시멘트 등
단단하고 딱딱한 것들로 포장되어 있는
오늘날의 도시에서 비는
지렁이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위기이다
인간의 세상, 그중에서도 특히 도시는
딱딱하고 단단한 것들로 뒤덮여 있다
부드럽고 흐물흐물한 것들은 멸종 위기에 처했다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인간의 문명이 존재하기 한참 전부터 지금까지
먹이 사슬 최하위에서 묵묵히 땅을 일구며
지구의 토양을 풍성히 해준 소중한 동물
지렁이
비가 내리면 숨이 막혀 지상으로 올라왔다가
사람의 발이나 차량의 타이어에 밟혀 압사하거나,
물이 말라버린 후 땅속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시멘트 위에서 방황하다가 그대로 땡볕에 말라죽는다
비 내린 다음 날,
지렁이 사체를 목격하게 되면
괜스레 마음이 불편하다
비 온 다음날에 출몰하는
길고 미끈거리고 꿈틀거리며
징그럽게 생긴 이 녀석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녀석이 없었다면 인류는 멸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빛을 싫어하는 음성 주광성이라 빛이 오는 쪽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며, 그 때문에 어두운 흙 속에서 산다
세상으로 쏟아지는 빛이 싫어
어둠 속에서 사는, 지렁이를 닮은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세상은, 비난과 충고질을 쏟아내고
질타를 하며 그들에게
노력주의와 낙관주의로 무장한 후,
다시 세상으로 나오라고 강요한다
미친 속도로 질주하는 돈에 대한 무한 집착과
돈과 인정을 향한 무한 투쟁이 이런 사람들 덕분에
브레이크가 걸린다는 사실을 세상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남들이 볼 수 없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살아가는
이런 사람들은, 세상 곳곳에 비(悲)가 쏟아질 때
비로소 숨을 쉬러 지상으로 올라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들의 존재가 가진 소중한 가치를
도저히 인식할 수 없다
지렁이는 흙 속에 살며 흙 속의 유기물을 먹고,
배출하는 과정에서 토양을 비옥하게 하며,
질감도 좋게 만든다
지렁이가 많이 사는 땅은
오염되지 않은 건강한 땅이라고 보면 된다
화려하고 웅장한 문명이,
자신의 위대함을 뽐내며
어깨와 목에 힘을 주고 으쓱거리며
하찮은 존재라고 낙인찍은
보이지 않는 작은 것들을 무시해도
결국 문명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인해
번성하거나 또는 멸망한다
지렁이는 암수 구분이 따로 없는 자웅동체다
자웅동체로 변해가는 인간 세상의 많은 존재들은
기묘하게도 점점 지렁이를 닮아간다
그렇지만
지렁이는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심각한 손상을 겪고도 몸을
복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짓밟고 깔아뭉개고 무시하고 업신여겨도
스스로 부활하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민중처럼 말이다
지렁이는 먹이사슬에서 최하위권에 있는 녀석이다
먹이사슬의 최하층답게 방어수단은 일절 없다
빠르게 움직일 수도 없고, 덩치도 작고,
피부도 약하고, 독도 없다
밟으면 꿈틀거리다 천천히 죽어갈 뿐
하지만 지렁이는
평화주의와 자연주의를 온몸으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생물이다
지렁이는 피부로 호흡을 한다
그래서 오염에 민감하다
지렁이처럼 머리가 아니라
피부로 세상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세상의 오염에 민감하다
잘난 듯 머리로 세상을 분석하는 인간들보다
피부로 세상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정이 간다
지렁이에게 정이 간다
지렁이 같은 사람들에게 정이 간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지렁이와 내가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나도 지렁이였다
지렁이처럼 사는 건, 하찮은 것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하찮은 것들은
사실, 전혀 하찮은 것들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