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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글을 쓴다

by 두두 Feb 20. 2025
브런치 글 이미지 1

모든 위대한 작품들 이면에는  
위대한 삶이 있고,
단독성을 갖춘 모든 작품들은
작가의 단독성이 피운 한 떨기 꽃이며,
시공을 초월한 작품들 뒤에는
시공을 초월한 정신이 있다.

어떻게 하면 감동적인 글을 쓸 수 있는가?

작법 따위는 배울 필요가 없다.
문예 창작과에 갈 필요도 없다.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처럼
방법을 가진 창작은 창작이 아니다.

요리를 잘하기 위해 꼭 요리학원에 가야 할까?
물론, 요리 학원에서 요리를 배우면
체계적으로 요리를 배울 수는 있을 것이다.

요리학원에서 가르치는 내용에는
요리 과정과 식재료의 양 등이 정형화되어 있다.

물론 그런 정형화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행착오와 연구 끝에 나온 결론이겠지만,
남이 미리 만들어 놓은 방식대로만 요리를 하게 되면,
그것에 집착하는 폐단이 발생한다.

현실에서는 모든 조건과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대로 정해지지 않는다.
사실, 불리한 조건과 상황이 더 많다.
그리고 조건과 상황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한다.

변화된 불리한 조건과 상황에서도
자신만의 근사한 요리를 만들어 내려면,  
정형화된 모든 방법들을 버려야 한다.

요리책과 요리법대로만
요리를 진행해 온 사람들은 식재료가 부족하거나
또는 필요한 식재료를 구할 수 없거나
음식의 맛과 양, 속도를 조절해야 할 경우,
혼란과 혼돈의 상태에 빠지기 쉽다.

노래도 마찬가지다.
보컬 학원에 가서 배우면
당연히 정형화된 체계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학원이나 학교의 맹점은
바로 그 정형화와 체계화이다.

창작자 내면의 예술적 욕구에 의한
표현들이 끊임없이 세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 싱싱한 생명력을 통해
창작의 지속성과 개성이 확보된 상태에서
정형화된 체계적 지식을 습득하면
더 튼튼한 자신만의
창작세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예술 창작의 세계에서는
독특한 개성을 갖춘 사람들이 드물까?
자기 내면의 창작 욕구가 활성화되기 전에
정형화된 체계를 먼저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 체계란 것은
새장이나 덫처럼
자연스럽게 약동하는
창작의 욕망을 옥죄기 십상이다.

체계란 단어 속에 숨어 있는
새장이나 덫이 보인다.

자기 내면의 자유의 새가
아직 부화하기도 전에 좁은 세장에 가두는 꼴이다.
그러니 다 고만고만한 크기를 가진
새장 속의 새들만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우선, 자기 내면의 자유의 새를
아주 크게 키우는 것이 먼저다.

그 새가 너무 커져서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새에 맞는 집을 만들어 주면 될 것이다.
물론 만들어 주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 같다.

예술이란 감상하는 사람들을 전제로 한다.
사람들은 새장에 갇힌 새를 보고 싶어 한다.
작은 새장에 갇힌 평범한 새는
그들의 관심을 오래 끌지 못한다.

하지만 거대한 새장에서
노래하는 거대한 새를 보면 그 즉시 매료된다.
그들은 감탄사를 내지른다.

다시 노래에 대한 비유로 돌아오면,
자기 노래의 독창성과 개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단 수없이 많은 노래를 열성적으로 연습한 후에,
보컬 학원에 등록해서
체계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글도 마찬가지다.
조정래, 황석영, 홍명희, 모파상, 체호프
카프카, 헤르만 헤세, 카뮈, 조지 오웰, 헤밍웨이
막심 고리키, 나쓰메 소세키 등의 작가들이
작법 따위를 배웠다는 말을  나는 들어보지 못했다.
베르나르 베르나르가 문예 창작과를 다녔다는 말을
난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은 그저 글을 쓰는 것을
미친 듯이 좋아했을 뿐이다.

물론, 재능은 어느 정도 필요할 것이다.
요리와 노래로 사람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려면
기본적인 재능이 꼭 필요한 것처럼.

타고난 음치, 타고난 미각상실자가
노래나 요리를 잘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아름답고 감동적인 문학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서
우선, 그런 시와 소설, 수필들을 엄청나게 읽으면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이다.
나를 가르쳐 줄 스승들은 주변에 정말 많다.

도서관이나 서점 방문,
심지어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도
훌륭한 스승들을 만날 수 있다.
 
재학 중에,
‘문학의 이해’라는 수업을 수강한 적이 있다.
졸업 후, 난 그 교재를 난 버렸다.

아무런 감동도 없고 흥미도 불러내지 못하는
그저 그런 교재였다.
그건 책이 아니었다.
거기서 언급된 온갖 복잡하고 난해한
문학 이론들을 알아야 감동적인
문학 작품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인가?
아니다. 결단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삶은
그 자체로 ‘그리스인 조르바’이다.
그는 조르바처럼 살았기에
‘그리스인 조르바’를 쓸 수 있었다.

김수영의 시들은 바로 김수영 그 자체다.
기형도의 시들은 바로 기형도 그 자체다.
돈키호테는 바로 세르반테스 자신이다.
[1984] [동물농장] [카탈로니아 찬가]는
조지 오웰의 화신이다.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황야의 이리]
[유리알 유희]는 헤르만 헤세 그 자신이다.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헤밍웨이
그 자체다.

모든 뛰어난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삶으로 예술을 창작했다.
우리는 그들의 작품에서
그들의 삶이 세상과 부딪히며 만들어낸
마찰음과 마찰열을 듣고 느낄 수 있다.

항상 삶이 최우선이다.
사람들의 심장으로 들어가
생각에 영향을 주는
예술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김수영의 말처럼 언어의 고통이 아닌,
언어 이전의 고통이 있어야 한다.

모든 진지한 것들은 울림이 있다.
가식과 허영을 제거한,
절절하고 솔직한 삶의 경험이 필요하다.

어떤 작품들은 깊은 울림을 주는 반면에
어떤 작품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건 내 경험의 폭이 너무 좁고 얕아서 그렇다.
아니면 그 작품들이 허접한 수준이거나.
현실적으로 나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나가면 된다.

카프카는 태어나 죽을 때까지
자신의 고향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
연애도 그리 많이 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힘이 있다.
비록 우울하고 기괴한 힘이기는 하지만.

내게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들을
내 스승으로 삼으면 된다.
그리고 그 작품들에게 받은
내면의 깊은 울림의 실체를 찾아가면 된다.
찾아낸 실체를 나만의 언어로 표현하면
좋은 작품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유와 사랑을 치열하게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독서는 그런 삶의 지도 같은 역할을 한다.

길을 잃을 때마다 그 지도를 보며
내가 가야 할 방향으로 다시 힘차게 나아간다.
그 끝은 죽음이 아니다.
내가 가야 할 곳은 나만이 살 수 있었던 삶이다.
오직 나이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삶.
흉내와 모방이 아닌 나만의 삶.

만약 세상 사람들에게
‘제발 남들처럼 살라’는 말을 듣는다면
지금 아주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세상의 바보들에게 주눅 들 필요 없다.
 
남과 다른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해서,
무조건 특이하고 별난 인생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특이하고 별난 인생에 집착하는 것도
결국 다른 삶을 모방하고 흉내 내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두 가지 모두 자신만의
중심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 삶에서는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늘 타인이 주인이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살아가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짓이 있을까?

특이하고 별나게 살고 싶어 옷을 벗고
알몸으로 바깥을 돌아다니거나
씻지 않고 지내거나,
조용한 도서관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은 미친 짓이지
독특하고 별난 인생을 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나를 웃고 울리는 건, 작가들이 쓴 글이 아니다.
그 글에 묻어난 삶의 고뇌와 고통 그리고
그들의 삶이 가진 독특한 맛과 향기가
내게 깊은 감동을 준다.

독특하고 개성이 넘치는
감동적인 작품을 세상에 내어 놓기 위해서는
독특하고 개성이 넘치는 고뇌, 고통, 사유
그리고 그런 삶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맛과 향기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삶을 추구하고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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