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동화 부문 선정작] 글 김현정
[황금 여우비]를 [오디오북]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미나는 자연의 숲에 도착하자마자 보물찾기 놀이를 입에 달고 있었다.
“너나 찾아! 난 그런 유치한 놀이 관심 없어!”
나는 미나에게 놀리듯 쏘아붙였다.
“엄마한테 다 이를 거야! 오빠 혼자 보물 찾으러 갔다고,”
미나는 6살 유치원생이다. 사람들이 미나를 보고 귀한 늦둥이라고 했다. 엄마 아빠도 미나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준다. 여기에 온 이유도 미나에게 숲 체험을 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 체험 활동 중 하나가 보물찾기다.
초등학교 5학년에게 보물찾기라니. 정말 말도 안 된다. 보물찾기는 유치원생에게나 어울리는 놀이다.
‘집에 있었더라면 친구들과 온라인 게임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이번 주말은 망했다!’
나는 보물찾기가 끝날 때까지 숨어 있을 곳을 찾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귀찮은 미나가 따라붙기 전에 냅다 뛰었다. 숨을 고르며 가까이에서 보니 소나무 둥치가 엄청나게 굵고 컸다.
“그늘에서 한숨 자고 내려가면 되겠다.”
눈을 감았다. 바람이 불어오자 향긋한 솔 냄새가 났다.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엄마 아빠 말로는 나도 이곳에 몇 번 왔다고 했는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솔 내음을 맡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들다 보니 자꾸만 졸음이 쏟아졌다.
눈앞이 가물가물해질 즈음이었다.
“어흥! 네 이놈! 냉큼 일어나지 못할까!”
난데없는 호랑이 울음소리에 졸음이 확 깼다. 눈앞에 호랑이 탈이 보였다.
“뭐야. 장난치지 마!”
아빠가 또 호랑이 탈을 쓰고 나를 놀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어허! 이놈 봐라! 난 이 숲의 왕, 호랑이다.”
호랑이는 다시 한 번 사납게 포효했다.
호랑이 울음소리가 숲을 돌아 내 귀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제야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슬쩍 눈을 떠서 호랑이를 올려다보았다.
불처럼 타오르는 호랑이의 눈빛을 마주하고 나서야 진짜 호랑이라는 걸 알았다.
“엄마야!”
나는 혼자서 몇 번을 엎치락뒤치락하고서야 겨우 일어섰다. 그리고 도망가려다가 호랑이 발에 걸려 다시 넘어졌다.
“그리 쉽게 도망은 못 가지!”
호랑이가 앞발로 내 등을 꾹 눌렀다. 나는 납작 엎드린 채 벌벌 떨었다.
“살려 주세요.”
“이제야, 네가 나를 알아보았구나!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난 너를 잡아먹을 테다.”
“제가 뭘 잘못했다고 처음 본 저를 잡아먹는다고 하세요?”
“어허! 이런 맹꽁이를 봤나! 감히 나의 용상에 떡 하니 누워서 잠을 자고도 잘못한 게 없다고 하느냐?”
용상? 뭐야. 그럼 이 그늘 자리가 숲의 임금, 호랑이가 앉는 자리란 말이야? 어휴, 난 이제 죽었구나 싶었다. 하지만 문득 호랑이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정신을 집중해서 머리를 팽팽 굴렸다.
무서워서 이가 딱딱 부딪쳤다. 그래도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그냥 이대로 호랑이 먹이가 될 수는 없었다.
“몰랐다니, 당치도 않다. 이 나무는 숲에서 가장 큰 나무다. 그리고 나뭇등걸에 난 나의 발톱 자국을 봐라. 이 표식만 봐도 여기가 숲의 왕 호랑이의 용상이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거다.”
“전 그런 거 몰랐어요. 여기에 온 것도 오늘이 처음이란 말이에요!”
“흥, 그건 네 사정이고,”
호랑이의 호통에 무서워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때 지지배배 울던 박새가 포르르 내려왔다.
“호랑이님! 이 아이를 용서해 주세요. 이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저지른 행동입니다.”
박새가 간곡하게 말하자 호랑이가 못마땅한 듯 콧등을 찌푸렸다.
“모르긴 뭘 몰라! 사람들은 언제나 숲속을 혼자 독차지하려고 해. 저 아이처럼요.”
갑자기 다람쥐가 나섰다. 다람쥐는 사람들에게 도토리를 빼앗겨서 항상 불만이 많았다.
평소에는 사람이 무서워서 발만 동동 굴렀는데, 오늘은 호랑이가 곁에 있어서 할 말을 다 하고 있었다.
“맞아! 맞아. 겨울만 되면 동면에 들어간 우리 형제들을 납치해 가서 잡아먹어 버려.”
이제 막 잠에서 깬 방울뱀도 다람쥐 편에 섰다.
“봤지. 내가 너를 살려 주려고 해도 안 되겠다. 어흥!”
호랑이는 입을 크게 벌리고 나를 집어삼키려고 했다.
“잠시만요! 사람이라고 모두 숲에 해를 끼친 건 아니에요. 저는 작년에 날개를 다쳐서 둥지도 짓지 못한 채 겨울을 나야 했어요. 그런데 사람이 만들어 준 새집 덕분에 건강도 회복하고 추운 겨울도 잘 지낼 수 있었어요.”
박새가 또 나섰어요.
“저도 사람 덕을 입었어요. 몇 년 전에 웅덩이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굶어 죽게 생겼을 때, 사람들이 저를 구해 주었어요.”
노루도 겁먹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도 나섰어요.
호랑이는 잠시 눈을 감고 고심하는 듯 보였어요. 그러자 동물들이 서로 자기 말을 하면서 소란을 떨기 시작했어요.
그때였어요.
꼬리 끝이 하얗고 몸은 황금빛인 여우가 나타났어요.
“내기?”
“호랑이님이 자신 있는 내기가 있어요?”
황금 여우 말에 호랑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눈을 번쩍 뜨고 소리쳤어요.
“좋다. 그러면 너 나랑 장기 한판 뜨자. 네가 이기면 너를 살려 줄 것이다.”
나는 속으로 이제 살았다 싶었다. 장기라면 자신 있었다. 아빠가 처음 가르쳐 준 게임인데, 요즘엔 아빠도 이긴다. 이게 다 컴퓨터 게임 덕분이다. 게임으로 장기를 열심히 배운 보람이 여기서 빛을 발할 거라곤 생각 못 했다.
그렇게 호랑이와의 장기 한판이 시작되었다. 노련하게 시작하는 나를 보고 호랑이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다람쥐 얼굴이 점점 울상이 되어 가고 있었다.
“보통이 아닌데. 어린아이가 장기를 왜 이리 잘 두는 거야?”
뱀이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중얼거렸다.
“장이요”
나는 힘차게 소리쳤다.
호랑이가 당황해서 긴 꼬리를 한 번 휘둘렀다. 그러자 옆에 있던 뱀이 정신이 번쩍 든 목소리로 말했다.
“호랑이님, 저쪽을 막으면 되겠습니다.”
뱀이 훈수를 두었다.
“옳거니. 그래. 자 막았다.”
“이건 반칙이에요. 옆에서 도와주는 법이 어딨어요?”
나는 울상을 지으며 불평을 했다.
“원래 장기는 옆에서 도와주는 거야. 너도 네 옆에 있는 동물들에게 도와 달라고 하렴!”
다람쥐가 나뭇가지에 앉아 비아냥거렸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 이겼다 싶은 게임이 흐트러지자, 집중력마저 떨어졌다. 그때였다.
“장이요”
호랑이가 호기롭게 소리쳤다. 수염은 옆으로 쭉 뻗어 있고 입꼬리는 귀밑에 붙었다. 호랑이의 표정만 봐도 내가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떡하지?”
나는 박새와 여우를 돌아봤다. 박새와 여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자신들은 장기에 장자도 모른다고 했다. 거의 다 이긴 게임이었는데 뱀이 결정적인 훈수를 두는 바람에 지게 생겼다.
이제 난 이대로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뱀과 다람쥐가 그 모습을 보며 깔깔대며 웃었다.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분명 숲 주위는 햇살이 환하게 내려앉아 있는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호랑이가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해 소나무 아래로 피했다. 호랑이는 자신의 털이 물에 젖는 걸 제일 싫어했다.
“지금이야! 어서 뛰어!”
황금 여우가 소리쳤다.
나는 황금 여우와 눈이 마주쳤다. 황금 여우는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지금이라고. 지금 도망가야 한다고.
나는 정신없이 가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얼마나 뛰어 내려왔을까? 호텔 입구에 서 있는 미나가 보였다. 장대비처럼 쏟아지던 소낙비도 멈추었다. 나는 그제야 뜀박질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소나무 아래 언덕에 앉아 있는 황금 여우가 보였다.
“잘 가.”
분명히 아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황금 여우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호랑이도 이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호랑이를 보고 놀라서 다시 미나와 가족이 있는 곳으로 뛰어 내려왔다.
“오빠, 어디 갔다 왔어? 한참 찾았잖아.”
미나가 볼멘 목소리로 칭얼댔다.
“어휴, 다 젖었네. 너 여우비 맞았구나!”
엄마가 홀딱 젖은 내 모습을 보고 수건을 가져왔다.
“여우비요?”
나는 속으로 엄마가 뭘 아시나 싶어서 물었다.
“그래. 여우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곤란한 상황에 놓이면, 비를 내려서 도와준다는 말이 있어.”
엄마가 수건으로 내 머리를 닦아 주며 말했다. 나는 엄마를 올려다봤다. 혹시 엄마가 소나무 언덕에서 내가 황금 여우를 만난 걸 알고 하는 말일까? 아니면 항상 이야기 지어내기를 좋아하는 엄마가 그냥 한번 해 보는 소리인지 헷갈렸다. 나는 소나무 언덕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그곳에는 바람에 흔들거리는 풀과 꽃들만 보였다.
#2023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동화부문 선정작, #바다에 무수히 많은 별빛이 있듯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도움의 손길이 있다 (마더 테레사), #글 김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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