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란 마냥 낭만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꽤 큰 고단함을 수반한다고 생각하던 나는 여행에 큰 감흥 없는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혜수와 단 둘이 나트랑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딱히 여행계획을 세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행지에서 가고 싶은 곳 한 곳을 꼽는다면 바로 나트랑 담시장이었다.
나는 쇼핑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었다.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부평역 지하상가를 처음 갔던 날의 충격과 즐거움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단돈 만 원만 있어도원피스에 티셔츠까지, 운이 좋다면 당장 입을 수 있는 옷 서너 장은 건져올 수 있었던 그 시기의 즐거움. 옷의 질은 말하면입 아프지만, 뽐내고 싶은 마음이 컸던 사회 초년생에게 1만 원에 옷 3~4장이라는 것은 신세계를 만난 듯한 환희였다. 그 시장에서는'현금 지불 시 할인'이 암암리에 퍼진 사실이라서 현금으로 결제하며 "언니, 천 원만 깎아줘요." 하면 그 이름 모를 언니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거스름돈에 천 원을 더 얹어주던 시절을 보냈다.부평역 지하상가에서 쌓은 나의 연륜이 언젠가는 발휘하리라, 믿고 있었다.
여행에 대해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다가, 출국 전 날 급히 담시장 쇼핑리스트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진주 제품, 캐리어, 각종 젤리와 간식류, 마카다미아, 운동복, 원피스, 크록스, 라탄가방과 수공예 제품 등 다양한 제품이 리스트에 올라와 있었다. 넘쳐나는 쇼핑 리스트를 전부 다 훑어보다가는 이번 여행이 스트레스로 남을 것만 같았다. 어차피 여행지에서 기념품을 사 와봤자, 현실에서는 골칫덩어리로 전락해 버린 사례를 꽤 겪었기 때문에 이번 여행에서는 양가 엄마들을 위한 진주 제품만 사오리라 마음먹었다.
담시장에서 흥정은 필수라는 글이 어딜 가나 눈에 띄었다. 흥정이라... 스무 살 멋모르던시절, 그것도 한국어가 통하는 곳에서는 "언니, 천 원만 빼줘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는데, 그때와는 달리 호기로움이 사라진 내가, 그것도 외국에서, 처음 가보는 곳에서 '그 말'을 할 수 있을지 스스로 확신이 들지 않았다. 아무튼 나의 나트랑 여행은 시작되었고 둘째 날 오전 무렵 적당한설렘과 은근한 긴장감을 안고 혜수와 담시장을 방문했다.
나트랑 담시장 신관 입구
택시를 탔고, 담시장 입구에서 내렸다. 이내 혜수를 따라 신관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기대했던 것보다 쾌적하고 깔끔하면서 모던하기까지 했던 담시장 신관 입구에 서자, 내가 갖고 있던 편견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냉방은 되지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내부가 깔끔했으며, 호객행위가 심한 편도 아니라서 이곳을 처음 방문하는 관광객도 큰 부담 없이 현지 문화를 느끼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오전 11시 무렵 도착했는데, 막 문을 여는 가게가 있었지만 대부분이 한창 장사를 시작한 시간이었다. 시장의 활력이 피부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저렴한 진짜 진주 목걸이
혜수의 손에 이끌려 진주 제품을 파는 가게에 들렀다. 질 좋은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며 가게 주인도 친절해서 한국인 관광객에게 이미 정평이 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진주 제품은 목걸이와 귀걸이, 팔찌류 등 종류가 다양했고, 알의 굵기에 따라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는데 가격이 우리나라에서 파는 것에 비해 1/3도 안 되는 것 같았다. '진짜 진주'가 이렇게 저렴할 수 있나, 약간의 의심이 들어 영어와 한국어를 반쯤 섞어서 사장님께 궁금한 것을 이것저것 여쭤보니, 그 가게 사장님은 질문의 의도를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언니, 이거 진짜 진주~ 엄청 싸~."라고 말하면서 모조 제품과 진품을 비교해주기까지 했다. 엄마를 모시고 이곳에 온다면 엄청난 효녀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가격과 퀄리티였다.
신나는 마음에 목걸이, 팔찌 할 것 없이 여러 종류를 착용해 보았는데, 가게 사장님은 귀찮은 구색 없이 우리의 요청사항을 다 들어주고 계셨다. 하나라도 더 팔고자 하는 장사 심리에서 나온 친절임을 알고 있지만, 손님을 진정으로 대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액세서리를 구매하는 온 과정이 즐겁게 느껴졌다.
팔찌 3종류, 알이 작은 진주 목걸이 1종류, 진주 귀걸이 3종류를 구입하는데 할인 전 가격으로 우리 돈 약 6만 원이 안 되는 가격이었다. 이 정도 금액은 우리나라에서 화려한 진주 귀걸이 하나 정도를 구매할 수 있는 수준이라, 그녀의 친절 앞에서 마음이 약해진 나는 흥정할 에너지를 순간 잃은 채 '이대로 계산해도 상관없겠다.'라고 생각했다.
"언니, 깎아 줘, 할인할인!" 혜수가 나를 대신하여 입을 떼주었다. 가게 사장님은 원래 저렴한 가격이라고 말하며 곤란한 듯 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결심한 듯, 우리가 요청한 가격과 원가의 중간 가격을 불렀다.
'아, 이것이 그 흥정이구나. 시작되었구나.' 이상한 짜릿함을 느낀 순간 용기가 생긴 나는 단호하지만 상대방이 덜 기분 나쁠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가게 사장님을 설득했다. 베트남 여행을 처음 왔고, 그래서 나트랑도 처음이고, 여기가 담시장의 첫 가게인데 부모님을 위한 선물이니 저렴하게 판매해 달라는, 영어와 한국어가 반쯤 섞인 말을 가게 사장님이 제대로 이해했을 리는 만무하지만, '그 언니'는 우리가 제안했던 정도와 비슷한 수준의 가격으로 제품을 판매해 주었다. 결과적으로 5만 원 초반대 가격으로 '진짜진주' 제품 7종류를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렇게 한 번 지갑이 열리니, 걷잡을 수가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저렴하면서도 질 좋은 상품들 앞에서 '필요한 것만 구매해야지.'라고 다짐했던 나의 결심은 속수무책이었다. 특히나, 저렴한 운동복 앞에서는 마치 내년, 내후년 입을 옷 까지도 장만하는 사람처럼 사이즈가 맞다면 봉지 안으로 제품을 집어넣기에 바빴다.
처음에는 어려웠던 '깎아주세요, 할인해 주세요." 하는 말이 이제는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고, 흥정하며 물건을 구입하는 과정이 무척 짜릿하게 느껴졌다. 이에 소비하며 느끼는 즐거움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담시장은 '담에 또 오고싶은 시장'이 되었다.
담시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곳에서 사람 사는 냄새와 활력, 에너지를 느꼈던 것 같다. 여행의 본질이란, 단순히 먹고, 마시고, 구경하고, 쉬는 것이 아니라 현지 문화를 느끼고 그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융합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완전한 감정을 느끼기에 가장 적당한 곳이 시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질 좋은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어서 무엇보다 좋았지만, 그 시장의 에너지 덕분에 담시장은 나에게 다음번에 또 찾고 싶은 시장이 되었다. 어쩌면 한 번씩, 무료한 시간에는 그 시장에서 나름 치열하게 흥정하며 느꼈던 작은 열정이 다시금 생각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