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10월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여름의 무더위가 언제 끝나나 손꼽아 기다렸는데 가을은 소리소문 없이 내려앉은 기분이 든다. 곧 훅하고 지나가 버리겠지만 윗 지방보다 남쪽에 있는 이곳에는 아직 단풍을 즐길 정도록 깊게 물들지는 않았다. 아직은 초록의 기운이 더 많이 느껴진다.
글쓰기 모임이 돌아오는 넷째 주 토요일. 일정이 있으시다고 해서 한 주를 당겼다. 요즘 그림 그리기에 한창 푹 빠져 있다 보니 글쓰기가 숙제 같이 되어 버렸다. 10월의 주제는 단풍, 등산, 독서 중에서 선택해서 글을 쓰면 된다. 어떤 주제를 글로 쓰면 좋을까 생각해 본다. 작기가 시작된 뒤로 일에 집중을 하고 시간 날 때 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진을 찍을 때도 보고 그리기 좋게 확대해서 찍는다. 아직도 실력은 부족하면서 뭔 자신감인지 그려보고 싶은 것이 많다.
주제: 그림에 푹 빠지다.
가을 단풍놀이를 가는 사람들이 탄 버스가 줄지어 지나간다. 학교에서는 수학여행을 가는 계절.
매일 아침 지나가는 은행나무들이 가득한 가로수길은 아직 완연한 가을이 내려앉지 않았다.
색이 옅어지기는 했지만 아직은 초록이 더 많다. 가을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고 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단풍이 한창이라며 사진들이 올라온다. 일이 시작되면서 사실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살기는 했다.
해야 되는 일을 제때 해내지 못하면 수입과 연관이 되다 보니 작은 실수는 큰 재앙 같았다.
나중에 오는 후폭풍이 크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 사는 사람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 쉴 수 있는 구멍도 필요하니까 틈틈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릴 때는 잡생각 없이 몰두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무엇을 그릴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동안 꽃사진들을 찍으면서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잘 그릴 수 있을까? 수없이 망설이고 시작하기가 겁났던 것뿐이었다.
겁 없이 무조건 고 가보자였지만 그림이라는 건 형체가 남아서 다시는 도전하지 못할까 봐 그랬던 거 같다.
아이들과 그림도 그리고 미술놀이도 많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무언가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안 해보고 후회하는 건 내가 아니다. 뭐든 열심히 하며 살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취미를 가져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뭔가에 꽂히면 3~4년은 줄기 차게 했던 것 같다. 자리를 많이 차지하고 있던 그 간의 흔적들을 당근에 다 팔아버리고 지인들에게 나누어주면서 한 트럭을 실어내야 했지만
그래도 즐거웠던 것 같다. 이제 나이가 들다 보니 취미로 수집이나 돈이 많이 드는 것은 피하게 되었다.
공간도 부족하고 내가 정말 학고 싶은 건지 충동적으로 과소비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도.
그림도 돈이 많이 든다고 말을 하긴 하지만 즐길 정도만 갖추면 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내가 좋아하는 것 그거면 충분하다.
남편에게 처음 그린 그림을 보여 주고 나서의 반응이 참 주먹을 부르긴 했다.
첫마디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야.", "너무 색 입히기에 열중한 거 아니야."였다.
"아니 내가 잘 그리면 화가를 하지."라고 투덜거리며 입을 삐죽거렸더니 "열심히 해봐."라며 웃는다.
요즘은 작년보다 일을 더 열심히 빨리 끝내기 위해서 노력 중이다. 시간이 나야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까.
남편은 그런 내가 신기한 것 같다. 아직도 쏟을 열정이 남아 있는 것이 부럽단다.
"그림 좋은 취미지."라며 여운 섞인 듯한 말도 흘린다.
색소폰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남편은 일에 지치고 연습할 장소가 마땅히 없어서 창고행이 되었지만
조만간 연습실을 만들 것 같다. 반주기 대신 노래방 기계를 넣기로 했단다.
큰 아이는 코인 노래방에 용돈을 다 가져다 넣고 있었는데 장소가 사라졌다.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아서,
낡은 기계와 뜯어진 의자, 도둑맞아 사라진 마이크, 코로나 이후로 방치된 듯했다.
큰 아이 보라고 사준 책들을 가져와서 내가 보게 되었다. 수채화 기초부터 채색 잘하는 방법까지 다양할 서적들을. 색감을 잘 살려보고 싶었고 명암과 여러 가지 기법들을 알고 싶었다.
쳇 GPT에 궁금한 점을 입력하면 상세한 설명이 나와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수채물감 추천, 수채화지 설명, 여러 회사 수채물감 비교, 수채화기법 등 상세한 설명들이 좋았다.
유튜브에서 나오는 단어들이 너무 어려웠는데 이 역시도 적어두었다가 찾아보기도 했다.
하나씩 알아가는 기쁨이 가슴 뛰게 한다. 계속 그리다 보니 남편이 처음보다는 좋아졌다며 자신감을 심어준다. 단풍, 등산, 독서라는 주제를 받았을 때 단풍을 그려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 은행나무는 초록이고 뭐가 좋을까 하다가 작은 아이와 학원 근처 편의점을 다녀오다 담장에 붙어 있는
마삭줄을 발견했다. 마삭줄이 빨간색 잎이 되는 줄 몰랐다. 초록과 빨간색이 함께 있어 그려보고 싶어서
사진을 찍었다. 스케치를 할 때는 잎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마삭줄 느낌이 안 났다.
남편에게 "어때?"라고 물어보니 잘 "그렸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고는 "뭐 그렸어?".
"마삭줄"이라고 대답했더니 "마삭줄은 잎의 크기가 거의 일정한데 크기가 왜 이리 차이 가나지?"
또 시작되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상식선에서의 지적이.
"개량 종인 가보지."
"마삭줄 모든 잎의 크기는 일정해."
스케치가 나름 만족스러워서 행복했는데 찬물을 끼얹는다.
이러려고 열심히 찍은 건 아니지만 사진을 보여줬더니 "영양부족이네"라며 말을 마무리한다.
한 두 번이 아니니 그냥 넘어간다. 원래 그런 사람이다. 생각은 하지만 참 적응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