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Lee Sujin
May 13. 2024
어떤 인간도 자신의 모습을 직접 볼 수도 본 적도 없다. 물에 비친 상을 통해서만 사랑하는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나르시스부터 조금이라도 더 나은 셀피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오늘날의 우리들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모두 무언가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자신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가장 가깝다 못해 나 자신이지 않는가? 그런 나를 직접 대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어째 탐탁지 않다. 본 적도 없는 나를, 나는 잘 알고 있는 것일까?
아, 손가락 끝에도 눈이 하나 더 달렸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을 해본다. 손가락에도 눈이 하나 더 생긴다면 아마도 나는 지금의 두 눈은 잠시 감고, 손가락 끝에 달린 눈을 크게 뜨고 한참 동안이나 내 얼굴과 표정을 자세히 보지 않을까 싶다. 깊이 사색하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 친구의 말에 껄껄 웃으며 맞장구칠 때의 내 모습, 거울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내 피부의 질감도 궁금하고, 심지어 나의 무표정까지도 긍금하다.
그러다 문득 손가락 끝에 눈이 하나 더 없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손을 들면 더 높이에서 더 멀리 볼 수도 있고, 손가락 하나 틈 사이에 떨어진 동전의 위치도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텐데. 귀지를 꺼낼 때는 또 얼마나 편리할지 말이다. 그럼에도 절대 자신의 본모습을 볼 수 없게 인간을 설계한 신의 의도는 무엇일까?
어쩌면 애초부터 인간의 눈이라는 것은 진실을 판별하는데 그닥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내가 내 자신을 본 적이 없다고 나를 모를 리 없다. 마찬가지로 내가 본 사실이라고 해서 다 안다고 할 수만도 없지 않는가? 사실대로 찍어내는 카메라도 작가의 의도에 따라 구도와 렌즈를 달리 할 수 있듯, 나의 눈도 얼마든지 나의 생각과 의도에 따라 사물을 왜곡시켜 받아들일 수 있음을 잊지 말자.
화가들이 열심히 그린 자화상이 떠오른다. 이제껏 결코 보지 못 한, 앞으로 영영 볼 수 없을 존재를 그리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고흐의 자화상에는 연민이, 윤두서의 자화상에는 위엄이, 뒤러의 그것에는 자기애가 넘쳐흐른다. 내가 자화상을 그린다면 어떤 모습일지 참으로 궁금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