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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뮤연뮤 Jul 13. 2023

1. 연극 <에쿠우스> 리뷰

 '에쿠우스'란 무엇인가

포스터 - 극단 실험극장

<에쿠우스>

2022/ 11/ 8 –2023/ 1/ 29

충무아트센터 중극장블랙

제작 – 실험극장

배우 – 장두이, 최종환, 한윤춘, 김시유, 강은일, 백동현, 채시라, 박수연, 유정기, 차유경, 이양숙, 박현미, 노상원, 박초롱, 조형일, 은경균, 채종국, 임대규, 김재훈, 김명준, 양선호


1. 초록

2. 본론

3. 결론



초록

초연부터 많은 화제를 가져왔고 무대에 올려질 때마다 관객에게 강렬함을 선사하는 작품이 있다. <에쿠우스>가 그런 작품이다. 압도적인 연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도발적인 주제에 보는 사람에게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그러나 그 뛰어난 우월함에 관객에게 어려움과 숙제를 준다. 그 숙제는 제목이자 작품에 등장하는 ‘에쿠우스’란 무엇이며, 작품의 주제가 무엇인가이다. <에쿠우스>는 여러 소재가 합쳐져 주제를 말함에 있어 한가지로 국한되지 않아 관객에게 어려움을 안긴다. 

또, 이해에 어려움을 주는 요인으로는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모순은 알런과 더불어 다른 주인공인 다이사트 박사에게서 발생한다. <에쿠우스>를 대표하는 핵심 키워드는 포스터에서 볼 수 있듯이 신, 인간, 섹스이다. 다만, 이글에는 정열, 야성, 사랑이란 단어와 개인적인 해석도 추가할 예정이다.


본론

올려질 때마다 많은 화제와 강렬함을 선사하는 작품이 있다. 그 작품은 바로 얼마 전에 막을 내린 <에쿠우스>로, 관객들은 인상 깊은 연출과 신, 인간, 섹스, 정열, 야성. 이 모든 것에 압도당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또 쉽게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주제를 가진 수준 높은 작품이다. 


그래서 ‘에쿠우스’란 무엇인가?


높은 수준 덕분에 재미와 더불어 관객들은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맞닥트린다.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어 작품 의도를 파악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쿠우스’란 무엇인지, <에쿠우스>의 주제는 무엇인가부터 활발하게 이야기된다. 본 글의 가장 중점이 될 주제이기도 하다.


작품은 1막과 2막으로 나누어져 있다. 1막은 알런의 성장 과정과 집안 분위기, ‘에쿠우스’에 빠지게 된 경위와 합체, 2막은 인간 본질과 알런이 정상 세계로 들어오는 내용이다. 

1막 5장에서 다이사트 박사는 자신이 꾼 꿈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제사장이 아이들의 배를 가르면 제사장의 우두머리인 자신이 펼쳐진 내장을 읽었음을 털어놓는다. 이는 정신과 의사로써 아이들을 반으로 갈라 파헤치는 스스로의 직업에 대한 설명이자 회의를 담은 대사이다. 

이성으로 아이들의 절개에 개성을 없애는 직업임을 비유적으로 나타냈는데 초반부터 박사가 가진 작은 의문과 회의는 극이 진행될수록 점점 커지고 결국 답을 내리지 못하고 관객에게 판단을 넘기고 잠식당한다.


결국 “어떠한 어둠이겠습니까?”라며 묻는 다이사트를 통해 작가는 관객에게 질문한다. 에쿠우스가 무엇이고 어둠이 무엇인지 말이다. 작가 피터 셰퍼의 질문에 대한 답은 작품에 있다. 1막 내용은 알런의 성장사로 갈등과 억압 그 자체이다. “일요일을 대단스럽게 생각하지 않는걸요.”라는 도라의 대사는 스트랑 부부의 균열을 나타내는 첫 번째 부분이다.


주 7일 이란 개념도 기독교에서 시작했듯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에게 일요일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도라 또한 그런 경우이다. 

반면, 유물론에 입각한 공산주의자이자 무신론자인 프랑크 입장에서는 단지 수많은 요일 중 하나일 뿐이다. 사소한 부분에서마저도 맞지 않은 둘은 서로를 절대 이해할 수 없다.


하나부터 열까지 맞지 않는 부부로 고통받는 알런은 모친의 세뇌에 예수를 숭배하다가 강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을 빼앗긴 후 숭배의 대상은 말로 변한다. 도라의 가문은 승마를 즐겼었어 모친은 알런이 고른 말 사진을 기특해했다.


다이사트 박사는 알런이 언제부터 말에게 관심이 있었는지 가족 모두에게 물어본다. 이에 도라는 승마를 자주 즐긴 조부모에 대해 이야기하며 가문을 자랑한다. 알런이 말에 대해 관심을 가진 계기는 바다에서 처음 말을 보고 타보고 나서부터다. 그리고 박사에게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는다.


알런은 사실 사람들이 승마 모자와 승마 바지를 입고 말에게 올라타 말채찍으로 말들을 때리며 승마술을 즐기는 것을 불만을 품고 있었다. 아들이 자신과 같은 걸 좋아할 거라는 도라의 예상을 비껴간 것이다. 

도라가 승마를 즐기는 철저히 인간의 입장이라면 알런은 말채찍을 맞는 말에게 공감했다. 밤중에 알런이 몰래 스스로 자신에게 재갈을 물리고 채찍질한 이유는 자신과 말을 동일시해 학대받는 말의 고통을 자신에게 지우는 것이다.

인간들의 죄를 모두 자신이 짊어진 예수의 행동과 유사하다. 제갈, 말채찍, 안장과 같은 것들은 십자가와 못, 면류관처럼 고통을 안기는 것들이다.


스트랑 부인에게 말은 신의 하수적 존재. 신을 위한 존재. 그러나 알런은 승마술부터 도라와 달리 ‘말’ 그 자체에 집중해, 그녀와는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다르다는 의미이다.


프랑크는 위와 같은 아들의 비밀을 말하며 결국 말 눈을 찌른 끔직한 일은 전부 종교 때문이라 확신한다. 그러면서 박사에게 알런이 말 눈을 찌른 그 날, 여자애와 데이트를 했다는 중요한 단서를 귀띔해준다. 이때 다이사트는 여자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가지 실마리를 얻는다.


데이트 한 여자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흥미로운 점이 3가지를 확인할 수 있는데 하나가 말을 향한 알런의 무조건적인 애정과 다른 하나는 아직 좁혀지지 못한 알런과 다이사트의 관계, 마지막으로 다이사트가 원만하지 못한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알런이 과거 기억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마구간에서 말을 가까이 봤던 기억을 떠올리는데 다이사트는 질에 대해 물어보는데 알런은 말에 대한 감상을 털어놓는다. 두 사람의 핀트가 어긋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 아직까지 두 사람은 거리가 있는 상태라는 의미다. 

또 질이 일하던 마굿간에서 말털을 빗어 주면서 너제트의 눈을 보고, 같은 호흡을 나누고 몸을 느끼며 황홀함에 빠진다. 순수하면서도 지독한 사랑이다. 

사진출처 Freepik - @YuliiaKa


초반에 보이는 다이사트를 향한 알런의 공격적인 행동은 그를 믿지 않아 거부하는 행동이다. 박사도 자신을 억압하는 부모와 똑같은 어른이라 생각해, 재판장에서 광고 노래만 부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 화살은 병원을 돌아다니며 다이사트 부부에 대해 들은 소문으로 박사를 공격한다. 그리고 이 공격은 작품의 다른 주제로 이끈다. 1막 18장에서 다이사트는 말한다. 


“결혼사진 속의 두 사람은 장래가 촉망되는 의사 부부였다오. 부산하게 구혼하여 부산하게 결혼하고 부산하게 절망했지. 부산하게 마음들이 돌아섰고 절개수술을 해야 하는 이게 바로 지금의 우리 형편이오.”, “나의 인생에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내가 뭔가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후략)”


바로 다이사트 박사가 부인과 사이가 좋지 못한 사실이 밝혀짐과 동시에 그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에 관한 내용은 뒤에 더 추가할 계획이다. 

이 뒤는 “자기 자신을 되찾아주는 일이잖겠어요?” 헤스터의 대사로 다시 알런에게 집중하게 되고 드디어 작중 가장 강렬한 부분인 1막 클라이맥스에 진입한다.


1막 클라이맥스는 알런과 상담, 과거 회상으로 바로 밤마다 알런이 사람들 몰래 저지른 일탈과 황홀에 대한 고백에 관한 내용이다. 마구간에서 순간 교감한 너제트와 3주일마다 함께했는데 단순히 너제트를 탔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이사트    그는 너에게 뭐라고 했나?

알런    “내가 너를 보고 있다”, “내가 너를 구해주리라.”

다이사트 어떻게 해서.

알런    “너를 태워 주리라. 둘이는 하나가 되는 거다.” 하고

다이사트 말과 기수가 한 동물이 돼?  -  1막 19장


상담 때 알런은 격정적으로 털어놓는데 그 격렬함은 상담할 때 그러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나, 과거에 말을 탈 때도 그랬다는 뜻이다. 알런은 말을 탐과 동시에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가 됐고 정신적으로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 


독실한 신자였던 도라는 다다르지 못한 더 높은 경지이다. 알런이 말에게 진심으로 대하고 너제트는 그에 대답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둘의 합(合)은 절대자와 신자가 통하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둘은 말과 인간이자 탱고를 추는 연인이며 동시에 억압당하는 알런을 구원하는 절대자와 신자이기도 때문이다.


알런    네 몸 안에 들어가 있고 싶다! 너와 일심동체가 되고 싶다. 영원히 영원토록! - 1막 21장


억압하는 그 무엇도 없는 자유로움, 말을 탈 것이나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도구가 아니다. 설탕은 알런이 자신을 통제하지 않고 숨 가쁘게 달려줄 다리자, 자유의 신에게 바치는 제물을 뜻한다. 

옷을 벗는 행위로 인간이 규정한 정상, 계급과 지위, 형식적인 겉모습을 다 벗어던져 이렇게 야성적이고 자유로운 본연의 인간 모습으로 회귀한다. 갑주로 인간이 아니라 말로 태어난 코러스에 관객들이 다소 놀라나, 생명력과 야성 넘치는 자유의 신인 에쿠우스를 보주는데 효과적인 연출이다. 인간이 규정하지 않은 자다음은 2막으로 넘어간다. 2막은 아버지에 대한 진실과 태도 변화가 담겨있다. 아버지 프랑크 스트랑의 위선과 진실 밝혀지면서 권위가 무너지고 동시에 알런은 달라진다. 

사람들 몰래 말과 일탈을 즐기며 하나가 됐던 날을 듣고 나니 다이사트 박사는 고민과 두려운 상태가 된다. 그건 이전부터 느낀 의구심에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존재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아래의 대사로 그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다.



다이사트    “왜?...... 왜 나를?...... 도대체 왜 – 나를?... 정말 나에 대해 다 설명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완전하고 절대로 틀림없이, 꼭 들어맞게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불행한 닥터 다이사트!” 2막 22장


다이사트   (...전략) 어느 경우든 간에 이번 일이 몹시 두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의사로서 내가 일생을 통해 피해온 질문을 해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민이 심해짐과 동시에 박사의 달라진 태도 변화는 도라와 더 대조된다.



도라 (...전략...) 그앤 나의 귀여운 알런이었는데, 그런데 악마가 깃들였다는 겁니다.

2막 23장



알런을 낳은 친모인 도라는 전적으로 기독교 신자의 입장에서 보고 있다. 25장에서 자신을 믿고 있다는 다이사트의 말과 타인의 신앙을 뺏는 것만큼 고약한 짓이 어디 있겠냐며 진심으로 다이사트가 알런을 생각하는 달라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박사는 거의 끝에 다다랐음을 짐작한다. 알런을 부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이사트   몰라서 그래요? 그게 고발이라는 거예요! 그의 눈총이 늘 내게 말하고 있는게 바로 그거랍니다. “적어도 난 달려봤어! 그런데 넌 해본 일 있냐?”......(솔직히) 난 샘이 나요, 헤스터. 알런 스트랑이 부럽다우.



알런은 비록 사회성이 떨어지고, 무시하나 그것은 보통 사람의 기준이다. 오히려 가장 야성적인 상태인 반면 박사는 현실에 눌려 그러지 못한 상태라 알런을 부러워하고 있다. 

에쿠우스가 보내오는 꾸짖는 듯한 시선과 “넌 달려봤어?”라는 질문은 박사 자신을 향한 것이다. 알런과 상담을 이어가며 오히려 자격지심과 자신에 대한 의심 때문에 본질적인 질문이다.


2막에서 작품의 주제를 나타내는 중요한 장면들이 있는데 그 중 한 가지가 바로 다이사트가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장면이다. 해당 장면은 2막 25장에서 볼 수 있다.


다이사트 (전략) ...... 실은 애기 하나 만들지도 못하거든. 사실 그건 내 탓이오. 아내 몰래 진찰을 받아 보았다. 정자 수가 최저라지 뭐예요. 그러나 난 이 사실을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난 그저 – 아내의 울분 섞인 동정을 받으면 됐으니까...... 모든 사람에게 마거릿은 청교도고, 난 이교도라 말하고 다녔지. 그럴 듯한 이교도지! 문명의 모체로 야성적인 회귀를 하다!


사실 그는 자식을 생산할 능력이 없다는 비밀이었다. 이로 인해 부인을 피하게 됐고 부부 사이는 점점 멀어져 열정 없는 소원한 관계가 된다. 남들은 다 하는 걸 해내지 못하니 자신감이 떨어져 부인에게 다가갈 수 없다. 스트랑 부부랑 다를 바가 없다.



다이사트    내가 거기 앉아 상상력과는 절벽인 여인에게 그런 말을 하면서 흥미를 끌어보려고 하다보면 저 변태의 소년은 요술을 부려 그걸 현실화하려고 하고! 내가 앉아서 아르고스의 땅을 달리는 반인반마신의 그림을 보고 있는 동안 – 창 밖에선 그 소년이 함프샤이어의 들판을 달리며 한몸이 되려고 하지!...... 난 밤마다 뜨개질을 하는 저 여인을 지겹게도 바라보고 있어야 하니 – 6년 동안 입 한 번 맞추지 않은 여잘 말예요 – 한편 그애는 한 시간 동안이나 어둠 속에 서서 자기 신의 털보 볼에서 흐르는 땀을 빨고 있는 거예요! (후략)


정열이 식은 관계인 다이사트 부부와 달린 알런은 자신이 숭배하는 대상과 정열로 불탄다. 에쿠우스와 함께 탱고를 추는 알런이 부러워 다이사트는 망설인다. 

그러나 알런이 불쌍한 아이, 어쩌면 새 아버지를 찾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헤스터의 말에 박사는 다시 상담을 이어간다.


다이사트    질 얘기 해 봐.

2막 27장


질    지난 주 신문에 여자들은 남자의 어떤 데 매력을 느끼느냐는 기사가 있었어. 다들 엉덩이라더군. 난 언제나 눈이라고 생각해...... 넌 그렇지 않아?


질   보고 싶지 않아? 난 보고 싶어. 농도 짙은 스웨덴 영환데 서로 헐떡거리며 아주 야단이래! 어때? 

2막 28장




사건이 일어난 날, 알런이 여자애와 데이트를 했다는 말에 질에 대해 알아내고자 한다. 질이란 인물은 알런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고 도라나 다이사트 부인과는 대조적인 인물이다. 성적으로 개방적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의사를 정확히 표현한다.

이 부분은 알런과도 대조적이다. 두 부부와 알런과 질의 관계로 비추어 볼 때 본 작품의 주제 중 하나가 열정과 사랑임을 알 수 있다. 두 부부는 맞지 않아 육체적 관계가 없고 열정이 없다. 


사랑하기에 열정을 불태우고, 열정을 불태우기 때문에 괴로운 법이다. 다이사트의 대사처럼 부부는 정열이 없기 때문에 고통도 없다.



질을 따라 야한 상업 영화를 보러간 알런은 그곳에서 여자몸을 보게된다. 알런도 흥미롭게 보다가 아버지 프랑크와 딱 마주친다. 프랑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알런은 성인 영화관 밖으로 끌어낸다. 이 다음은 알런과 질, 프랑크 세 사람이 어색하게 삼자대면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2막 30장, 프랑크는 굳은 표정으로 말한다. 자신은 그저 영화 포스터 일을 의뢰 받아서 왔으며 이런 영화 일 줄은 몰랐으니 시의회에 고발할거라며 두 사람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한다. 

알런을 강압적으로 억누르고 평생 세웠던 아버지로서의 권위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본능과 위선이 밝혀져 부끄러워진 프랑크는 재빨리 도망친다. 그런데 이 일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아빠가 불쌍했어.” 위선이 드러나며 권위가 무너지면서 오히려 진실된 모습을 들켜 바로 알런이 아버지를 이해하고 어머니가 너무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질에게서 성적 욕망을 느껴 아버지를 공감하고 이해하게 되어서다.


그래서 알런은 질을 만지고 가지고 싶어지고 솔직한 성격의 질은 둘만 있을 장소로 그를 이끈다. 그곳은 말들이 지내는 장소이면서 신성한 신전인 마구간이다. 밤마다 한 몸이 됐던 너제트가 있는 신성한 공간으로 들어서려 하자 알런은 오히려 겁에 질린다. 연인이자 단 하나뿐인 신자가, 신성한 신에 대한 배신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알런은 두려워하면서도 옷을 벗는다. 사회적 계급을 한정 짓는 옷을 벗어 에쿠우스와 하나가 됐던 1막에서처럼 질과 하나가 될 상황만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알런이 말한다


알런   하나가 됐어. 쭉 밀어 넣었어.


1막 클라이막스처럼 비슷한 장면이 연출된다. 바로 ‘하나가 된다’가 유사한 부분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1막에서 알런은 말인 너제트와 하나가 됐으나 질과는 실패했다. 

알런은 자신의 신, 에쿠우스에게 두려움을 느낀 탓이다. 바로 변절한다는 생각 때문인데 사람은 나이를 먹으며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자란다. 그렇게 선택이란 걸 하게 되고 자신만의 삶을 살게 된다.

알런의 관심사가 종교에서 말, 말에서 인간으로 넘어가려는데 올바른 정신적 성장을 이루지 못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말의 눈을 찌르는 폭력적인 선택을 한다. 결국 스스로 눈을 찌르고마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오이디푸스와 똑같은 선택이었다. 눈을 찌르면 빛을 잃고, 빛은 잃으면 어둠 속에 묻힌다.


오이디푸스가 스스로를 벌 주고 빛을 꺼버리는 것처럼 결국 알런은 자기 손으로 불태웠던 열정을 어둠 속에 묻음을 의미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은 결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고 저지른 과오를 인정해 눈을 찔렀다. 이를 볼 때 도라보다 더 순수하고 동시에 청소년기에 이르지 못한 미성숙한 상태였던 알런은 변화를 겪고 스스로의 과오를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다이사트는 자신은 어둠을 보는 방법이 필요하고, 그 어둠은 신이 규정한 것이 아니며 어떤 것인지 묻는다. 관객에게 하는 질문으로 무엇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는 개개인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코러스를 시작으로 알런, 다이사트 순으로 조명이 꺼지면서 점점 빛을 잃어가며 막이 내린다. 그렇게 알런만이 지녔었던 열정과 개성은 어둠 속에 뭍힌다.


결론

<에쿠우스>가 하고자 하는 주제가 어려운 이유는 주인공의 직업 때문으로 추측한다. 누구보다 이성적 사고를 요구하는 위치인데도 정열을 불태우는 알런-말의 관계를 부러워하고 자신의 일은 아이들의 개성을 죽이고 정상을 만드는 것이라며 회의를 느끼는 모순되는 상황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이사트의 고민이 관객에게 더 깊이 와닿는 효과도 있다.


<데미안>의 말처럼 알런은 지독한 싸움을 했다. 그래서 그 싸움 끝에 가장 사랑하고 받들어오던 대상의 눈을 찔러 빛을 꺼버려 정상의 세계로 나오는 데 성공한다.

인간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정상’은 분명 존재하고 그것은 우리가 최소한으로 지켜야 하는 선이 된다. 작가는 심리학의 한스 이야기와 실제 사건을 조합해 잘 표현해냈다.


그래서 본 글의 주제인 ‘에쿠우스’란 무엇인가에 대한 결론은 신처럼 절대적이면서도 야성과는 거리가 먼 현대인이 열정을 불태울 대상 정도로 정의할 수 있다. 말은 신이면서 열정을 불태우는 생명력 넘치는 뜨거운 존재로 현대인에게 사라진 야성이다.


마음속에 열정을 불태울 대상 하나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알런도 그 열정을 불태울 대상을 스스로 어둠 속에 물어버렸으니 애석한 일이다. 


작품을 본 관객들이 자신을 위해 마음 한구석에 작게나마 열정을 불태울 대상 하나 품기를 바라는 바이다.


+범우사에서 출판한 희곡 <에쿠우스>를 부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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