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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뮤연뮤 Sep 13. 2024

27.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리뷰

'고도'란 무엇인가?

파크컴퍼니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리뷰 : ‘고도’란 무엇인가?

2023.12.19 ~2024.02.18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파크컴퍼니

신구, 박근형, 박정자, 김학철, 김리안     


2024.04.26 ~2024.05.05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파크컴퍼니

신구, 박근형, 김학철, 조달환, 이시목     


1. 들어가며

2. 스토리 라인

3. 부조리극

4.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이해하기

5. ‘고도’는 God, 신?     

6. 나오며


1. 들어가며

@yeonmyu_0113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이 올라오는데 해당 작품은 <고도를 기다리며>가 이해하기 어렵다에서 시작한다. 소개 문구가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요!”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그 어려움이 새삼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부조리극을 대표하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분명 볼만한 작품이다.   

  

2. 스토리 라인

친구 사이인 블라디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 그들은 어느 큰 나무 앞에서 ‘고도’라는 인물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기다리는 와중 포죠와 럭키를 만나기도 하지만 ‘고도’라는 인물은 오지 않는다. ‘고도’에 대한 소식을 가져온 소년에게 ‘고도’ 씨가 언제 올지 물어보지만 알 수 없다. 그렇게 그들은 또 ‘고도’를 기다린다. 하지만 ‘고도’가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고도는 과연 올 것인가?     


3.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대표적인 부조리극이다. 부조리극에서 인간이 자신의 본성과 목적을 알 수 없고 허무와 불확실성은 인물들이 겪는 시련으로 인간 존재의 의미와 무의미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런 부조리극은 세계 대전과 연관있다.     


세계 대전은 신이 존재한다면 이런 지옥으로 내버려 둘 리 없다는 절망과 다른 짐승과는 달리 이성을 지닌 우월한 존재라 여겼던 인간에 대한 실망을 가져왔다. 혼란한 상태로 어지러운 세계, 인간의 지성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밑바닥을 봐버렸다. 전쟁을 겪고 그 후유증으로 존재론적 위기에 마주한 것이다. 


4.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이해하기

<고도를 기다리며>는 텍스트나, 공연 모두 감상에 나름의 인내를 요구한다. 매우 고요하고 작품이 가지는 독특한 특징 때문인데 하나는 등장인물 간의 대화가 종잡을 수 없다는 점이다. 많은 대화를 나누지만, 그 대화 내용이 의미 있진 않다. 그리고 대화는 고도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 고도는 언제 올까? 의 반복이다. 이 반복은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yeonmyu_0113

심지어 배경도 황량한 풍경에 큰 나무 한 그루, 시간적 배경은 달을 한 번 맞이한다 정도만 알 수 있고 그 외에도 작품 자체에서 제공하는 정보가 매우 제한적이라 추론하기도 쉽지 않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이해하기 어려운 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다른 하나는 ‘고도’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 때문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이해하는데 가장 간단한 방법은 생각의 흐름을 바꾸는 것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의미 없는 말의 반복과 이성으로 이해하기 힘든 그들의 대화는 그들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져있음을 시사한다. 그래서 이 혼란을 보여주는 목적이 무엇인가? 로 생각하면 관객은 의문에 빠진다.     


그들의 혼란스럽고 무기력한 상태를 보여주려는 것 자체가 목적임을 안다면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해하기 한층 쉬워진다. 그리고 왜 이런 상태에 빠졌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사람은 우울하고 무기력한 상태의 경우 기억력이 감퇴하고 생각의 논리가 무너진다. 시간의 흐름도 무뎌져 언제 해가 떠올랐는지, 언제 밤이 찾아왔는지 계절의 흐름에도 무감각해진다. 그리고 그 우울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가 흔들릴 때도 깊은 무력감과 우울에 빠진다. 황량한 무대는 아마 이런 상태를 반영한 것으로 추측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실존이 흔들려 우울과 무기력해 무의미한 대화를 주고받고 그 이유는 세계 대전, 그래서 그들은 희망으로 삼은 ‘고도’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라고 생각하면 작품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둘의 이상한 행동과 말이 정신적으로 안정된 상태가 아님을 안다면 이해하기 쉽다.     


인간은 건강한 상태라도 변화에 두려워한다. 그런데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상태라면 변화가 더 어렵다. 디디와 고고는 기약 없이 고도를 기다린다. 찾아 나설 수도 없다. 고도가 오기로 했으니까. 오기를 기다리며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고도를 만나면 다 해결될 것 같으니 고도를 만나려 한다. 하지만 떠날 수 없어 그 자리를 지킨다. 한마디로 정체된 상태다.     


존재론적 위기를 보여주기 위해 성격, 의사 소통의 혼란, 절망, 혼돈, 불안해하는 모습의 인물을 만드는 게 아니라 존재론적 위기이기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작품을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관극하면 이해할 수 없는데, 이해를 하면 무슨 상황인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5. ‘고도’는 God, 신?

<고도를 기다리며>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다른 한 가지 고도는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대사로 언급만 될 뿐이다. 고도에 대한 정보는 많지도 않고 모호하다. ‘고도’의 정체에 대해 많은 의논이 있었고 God, 신과 같은 절대자로 해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작가 사무엘 베케트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도’를 신으로 해석하지 말라고 언급했다. 덕분에 관객은 이해하기 더 어려워졌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부조리극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신으로 생각하지 말라던 작가의 발언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는 절대자보다는 희망으로 해석함이 이해하기 쉽다. 단, 그 희망이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 의미에서의 희망이 부합했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고도가 오기를 기다린다. 그들에게 고도는 희망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발목을 붙잡는 존재다. 언제 올지 약속해주지 않으니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없다. 둘은 고도 때문에 수동적 상태가 됐다.     


죽으려 해도 죽는 것도 하지 못한다. 무게나 끈 등 여러 이유를 언급하는데 접시에 코 박고 죽는다는 표현이 있는 만큼 죽을 용기조차 없는 것이다.     


신발과 모자는 쓸모 있음과 없음만이 중요하지, 존재에 대해 입증할 필요가 없다. 사물의 존재 입증은 사람이 사용하고, 알아주고 인간이 부여하는 것이다. 쓸모로 정해진다. 그러나 고고와 디디는 인간이다. 신발과 모자처럼 수동적이어서는 안 된다. 사유하고 고뇌하는 것이 인간의 특권이기에 사유와 고뇌 과정을 통해 자신이 선택해 나아가야만 한다. 하지만 고도 때문에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만 맴돌며 그 상태를 유지한다.     


‘나는 하려면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면서도 두려움에 어쩔 수 없다며 스스로를 납득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의 굴레에 빠진 상태이니 고도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부정적 미래이다. 구원을 가져올 신이 아니다.     


감옥에 갇힌 죄수들이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데 고도를 기다리는 모습이 감옥에 갇혀 밖으로 나가기를 기다리는 자신들의 상황과 비슷함을 알아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1막에서의 포조와 럭키의 관계가 고도와 고고, 디디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일꾼이래도 럭키의 대우는 부당하다. 2막에서 포죠는 시력을 잃지만, 그럼에도 럭키는 벗어나지 못한다. 고도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둘처럼.     


6. 나오며

<고도를 기다리며>는 고도를 기다리는 고고와 디디의 모습으로 끝난다. 하지만 그 모습에 희망은 없었다. 그저 끝을 알 수 없는 답답함과 허무함만이 있었다. 혼란하고 황량한 상태가 어지럽고 인간 지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그때의 세계. 전쟁으로 인해 존재론적 위기를 겪고, 그 흔들리는 모습이 <고도를 기다리며>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실존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는 이 작품에서 고고와 디디가 과연 실존하는 존재인가에 대한 의문이 마지막으로 남는다. 실존주의는 ‘나는 무엇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통한 인간의 존재 방식이다.     


인간은 태어난 이상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해야만 한다. 이런 선택에 대한 불안하면서도 선택을 통해 자신과 미래를 만들어가는 존재다. 하지만 둘은 주저앉아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다. 그러니 둘은 실존한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 남는다. 정체된 두 사람을 보여주며 관객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떻냐고.

@yeonmyu_0113

*C-STRAW에 게시한 글입니다.

https://c-straw.com/posts/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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