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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Jul 10. 2023

화로구이집에서 혼술을 해봤습니다

여전히 타인의 시선이 신경쓰인다면

언젠가 '혼술남녀'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습니다. 노량진 공시생과 학원 강사들의 혼술 라이프를 그린 드라마로 알려져 있죠. 드라마가 방영되던 2016년은 혼술혼밥으로 대표되던 이른바 '나홀로 문화'가 막 태동하던 시기이자, 동시에 정부에서 극심한 취업난을 해결하고자 공무원 채용을 큰 폭으로 확대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드라마는 첫 씬부터 배우 하석진(진정석 역)이 맛깔나게 혼술 즐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도 이른바 '혼밥 레벨 최고봉'에 해당한다는 고기집에서. 노량진 학원가에서 스타강사로 통하는 진정석은 건너편 테이블 여자들이 '고기집에서 혼자 술 먹는 사람 처음 본다... 주변에 사람도 없나봐'고 비아냥대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보란듯이 맥주 한 잔을 시원하게 원샷 때린 후 '그래, 이거지' 하는 미소를 짓습니다.


원삿 후 나오는 찐텐 표정 (ⓒ tvN)


혼밥, 혼술이 막 등장하던 당시 분위기를 감안했을 때 고기집에서 혼술은 정말 쉽지 않은 일니다. 어디까지나 라마니까 가능한 일이죠. 드라마에선 코 옆에 점 하나만 찍어도 아내를 못 알아보니까요. 그래서인지 당시의 저는 드라마의 럭셔리 혼술 장면이 굉장히 멋있어 보였습니다. 마음 속으로 '나도 저렇게 혼자서 당당한 모습으로 맛있는 음식과 술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박한 로망 하나를 품게  정도로 말이죠.


런데 한편으론 그까짓 혼술이 뭐라고, 로망이란 표현까지 빌려가며 제 마음 속 한자릴 차지했던 걸까 싶어요. 그건 아마 혼술할 때 내 모습을 바라볼 타인의 시선, 더 정확히는 홀로 있는 내 모습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왠지 초라해보이지는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 때문이었을 겁니다.


문득, 언제부터 그렇게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게 된 건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그간 걸어온 삶의 족적들을 앨범을 보듯 순서없이 펼쳐봤습니다. 그렇게 이런 저런 순간들을 꺼내보다, 우연히 아주 먼 어린 시절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유치원생 시절, 영어학습지 교습을 담당하던 선생님이 수업 후 어머니에게 제 영어실력에 대해, 으레 하던 얘기와는 다르게 진지한 투로 칭찬을 늘어놓으시던 걸 우연히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 직접 해주는 칭찬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거든요.


신기하게도 우연히 엿들은 칭찬은 다른 칭찬과는 다른 힘이 있었습니다. 그 칭찬은 도 모르는 사이 순식간에 스스로에 대한 무의식적인 믿음으로 자리매김해 버렸죠. 


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K-조기교육에 힘입어 친구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수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좋게 봐주는 것은 언제나 썩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고, 나에 대한 친구들의 시선은 나 둘 모여 스스로에의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데 일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머지않아 중요한 변곡점을 맞이합니다. 좀 열심히 공부한다는 친구들은 모두 거친다는 대표적인 관문, 특목고 입시에서 말이죠. 안타깝게도 결과는 좋지 않았고, 그동안의 믿음은 현실의 높은 벽 앞에서 무참히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보통 이 시기에 숱한 학생들이 처음으로 실패라는 걸 경험합니다. 렇기에, 쩌면 이 실패 자체는 그리 특별한 게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과보다도, 좋지 않은 결과에 어딘가 달라진 주변 친구들의 시선이 더 큰 타격이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 그리고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인식까지 한순간에 '쟤도 알고보니 별 거 없더라'는 식으로 뒤집히는 건, 한창 예민할 사춘기 시절에 경험하기엔 상당히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돌이켜보니 성인이 되어서도 타인의 시선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건 이 때의 경험이 크게 작용한 듯 합니다. 나를 향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지금은 이렇게 평화롭지만, 어설프게 행동했다가 언제고 또 다시 잔인하게 돌아서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싹튼 것이죠.


그 두려움은 '다른 사람들이 실망하면 어쩌지', '날 이상하게 보면 어떡하지' 같은 표현들로 치환되어 많은 순간 제 발목을 잡아왔습니다. 당당하게 혼술을 즐기는 드라마 속 장면이 로망으로 다가왔던 건, 그 장면이 이런 내 심리 상태와 강렬하고도 비극적인 대비를 자아기 때문었던 겁니다.




얼마 전, 평소 가보고 싶어 저장해두었던 화로구이 전문 이자카야에 가봤습니다. 반원형의 다찌석으로 구성된 조그만 공간에는 두 팀 가량의 손님들이 먼저 들어와 있었습니다. 혼자 온 손님은 저 뿐이었죠. 그날따라 조용히 '나를 위한 보상'을 해주고 싶었던 저는 차분하게 리에 앉아 메뉴판을 슥 보고는 1인 화로구이 모듬에 레드락 생맥주 한 잔을 주문하였습니다.

 

(고기가 좀만 더 많았으면...)


공교롭게도 먼 쪽 자리에서 혼자 술 마시는 것에 대해 이런저런 얘길 하는 것이 귀에 들어오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닥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저 온전히 내 앞에 놓인 음식, 내 기분에만 집중하려 했죠. 그러고는 달궈진 화로에 양 프렌치랙, 소꽃살, 이베리코 돼지목살에 닭목살까지 야무지게 구워 먹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맥주까지 한 모금 털어넣으며 느꼈습니다.


'아, 간만에 느끼는 찐 행복이다'


왜 그때는 몰랐을까요. 타인의 시선과 기대로 만들어진 믿음에 기대어 사는 게 얼마나 위험하면서 동시에 불필요한 것인지, 때로는 스스로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그리고 그게 혼자 이자카야에 방문하는 것처럼 시작이 좀 어려울 뿐 막상 해보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음 말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 사르트르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알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가족, 학교, 직장 등 타인과의 관계를 벗어나서 스스로를 설명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기는 하죠. 하지만 사르트르는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당신에게 달렸다"도 합니. 러니까, 일단 내 삶은 내 뜻대로 채워가면 되는 겁니다.


이제 더는 밖에서 혼술, 아니 다른 사람의 시선이 전만큼 두렵지도, 신경쓰이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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