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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Mar 27. 2024

사람들은 모두 외롭다.

난 외로워지면 인스타에 스토리를 올린다. 누군가와 연결되는 느낌이 필요해질 때, 그러니까 혼자인 느낌을 받을 때 말이다. 올린다고 해도 뭐 별거 없다. 내가 있는 곳이나 상황을 그저 나열할 뿐이다. 그러면 아주 가끔 DM이 오고, 그 DM에 감사함을 느끼는 거다. 물론 한 두마디 정도 나누다 대화는 마무리된다. 아무렴. 


다른 사람의 인스타 스토리는 잘 보지 않는다. 친구 수백 명의 일상이 궁금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장 친한 친구들의 일상도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나중에 직접 만나 그간 무엇을 했느냐 물으면 그만이다. 친구 수백 수천명의 스토리를 전부 흥미롭게 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수백 수천 숫자의 의미는 전투력 측정기에 불과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내 일상이 누군가에게 흥밋거리가 되길 바란다. 이런 모순 때문인지, 내 일방향적인 소통은 외로움을 잊는 데 그리 도움이 되진 않는다. 내가 남들에게 관심이 많지가 않으니, 그 반대급부로 내 인스타 친구들도 내게 큰 관심을 쏟아주지 않는다. 그게 내가 인스타그램을 잘 하지 않는 이유다. 


SNS를 많이 하는 사람을 보고 외로워서 저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외롭지 않은 사람은, 강인한 사람은 SNS를 하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환상은 알게 모르게 퍼져있다.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지 않은가? 먼저 나부터 좀 그런 생각이 있었다. 지금도 뭐 없는 건 아니지만. 하지만 최근 그 생각에 대한 반례를 발견했다. 그건 나였다. SNS를 하지도 않는 주제에 심하게 외로워하는 나였다. 


SNS를 하든 하지 않든, 사람들은 모두 외롭다. 가족의 사랑을 받아도 외롭다. 애인의 사랑을 받아도 외롭다.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는 슈퍼스타여도 외롭다. 사랑을 아무리 많이 받는다 한들 결핍을 느끼고 말 테다. 무언가 부족할 테다. 사랑도 능사가 아니고, 돈도 능사가 아니다. 


“엥?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없다면 돈이 모자란 건 아닌지 생각해보세요” 

나는 재치를 호소하려는 듯한 이 관용어를 몹시도 싫어한다. 황금만능주의를 유쾌한 듯, 직설적인 양 긍정하며 반박은 받지 않으려는 도둑놈 심보가 괘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부자 유명인들은 왜 자살을 하는 건데. 


“웃기려고 말한 건데 왜 이렇게 진지해?”

그러면 뭐 할 말은 없다. 말이 샜다. 



우리는 시끄러운 술자리에서도 외로움을 찾을 수 있고, 대학축제나 놀이공원에서도 외로움을 찾을 수 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외로워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롭지 않으려고 뭐든 몰두할 것을 찾아내려 한다. 일이든, 취미든, 뭐든. 나 같은 경우에는 외로울 때면 자주 보는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가 사고 싶은 걸 찾고, 음악 디깅을 하고, 재밌는 영상을 보고, 나무위키에 들어간다. 그러다 가끔 글을 쓰기도 하고. 이 모든 행위는 몰입으로 자신의 존재를 잠시 잊음으로써 외로움을 해결하려는 인간 특유의 애처로운 생존 방식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걸치는 한 잔. 편의점 알바생이 안녕히 가시라고 소리치는 일이나 먼저 건너라고 손짓하는 운전자의 표정에 온정을 느끼는 일. 그런 호의와 같은 일들에 나는 아주 잠시나마 외로움을 잊을 수 있다. 다만 종국에 찾아오는 외로움은 필연적이라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 


결국 사람은 몰두하는 시간 이외의 모든 순간에 외롭다. 

그러니까 SNS 업로드 빈도로 그 사람의 외로움을 가늠하지 말자는 얘기다. 

그건 그냥 활달한 사람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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