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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May 29. 2024

“본성”이라는 단어는 오용되곤 한다.

“술에 취하면 본성이 나온다.”라는 말에 대한 단상

생각은 자유지만, 내뱉는 건 책임을 져야 한다. 


입 밖으로 쉬이 내지 못할 편견이 생기거나 누군가를 혐오하게 되었을 때, 심지어는 뭔가 저질러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그럴 때마다 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 부단히도 노력하는 편이다. 그것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가 아닌, 나도 모르게 그런 나쁜 생각을 -엄밀히는 나쁘게 보일 생각을- 누군가에게 말하게 될까 봐, 어느 날 그런 상황이 왔을 때 상상으로만 하던 무언가를 관성적으로 행하게 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다. 


‘생각은 자유’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자유는 어떠한 식으로든, 최소한 머릿속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이 죄가 되어서는 안된다. 생각을 멈추는 것은 외압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에 따른 일이어야 한다. 나쁜 생각은 나쁜 결과를 낳기도 하지만, 내가 왜 이 생각을 멈춰야 하는지, 내가 왜 그 짓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터무니 없는 상상의 실현이 내 삶과 타인에 어떤 식으로 피해를 줄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인간이 세상에 목적 없이 그저 던져진 것처럼, 생각도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사회적으로 형성될 나의 못난 이미지는 감수해야 할 일이겠다. 그를 부정하는 것도 자유지만, 나를 나쁘게 생각하는 것 역시 그들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 내 자유롭고도 나쁜 상상과 편견을 입 밖에 내지도, 실제로 행하지도 않으려고 한다. 좋고 나쁘고의 기준은 사람마다 너무나도 다르고, 그 차이로 인한 갈등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다짐이 무색하게도 나는 종종 불편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서스럼없이 꺼내 놓곤 한다.  


제일 친한 친구와 그 친구의 여자친구와 함께 맥주를 마신 적이 있었다. 그 둘을 만나기 전에 나는 집에서 대게를 먹었는데, 당시 집안 분위기가 좋지 않게 유지되던 차에 아버지께서 대게와 가리비를 사오셨고, 비싼 음식으로 형성된 가족적인 분위기에 힘입어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새 위스키(요이치 그란데)를 따게 되었다. 그간의 상처를 어떻게든 봉합하려는 듯 술잔과 덕담이 오가던 그 식사 자리에서 나는 아버지께서 따라주시는 위스키, 소주잔에 가득 따라주신 위스키를 넙죽넙죽 받아먹었고, 그렇게 별안간 열린 단합대회는 내 위스키와 형이 일본에서 사온 사케(닷사이 준마이 다이긴죠 23)를 모두 소진하고, 할머니께서 예전에 담가주셨던 인삼 담금주를 추가로 따고 나서야 끝이 나게 된다. 


그렇게 약속에 약간 늦은 상태로 친구와 그 여자친구가 있는 곳으로 허겁지겁 뛰어간 나는 맥주를 두어잔 마시고 기억을 잃게 된다. 다음 날 영문도 모른 채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먼저 핸드폰과 지갑을 확인하고, 어제 있었던 일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1차로 수제맥주집을 가서 맥주를 두어잔 했고, 2차로 치킨집에 가 치킨과 맥주를 먹었다는 기억은 나는데, 무슨 말을 나눴는지는 당췌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아어제 대게먹으면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ㅋㅋㅋㅋㅋ”라며 조심스레 간을 봤고, 친구는 내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나를 대해주었다. ‘아 별 일 없었나? 제발..’ 그럼에도 나는 불안감을 떨쳐 낼 수 없었다. 필름이 끊긴다는 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고, 다음 날 주검으로 발견된다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자괴감이 몰려왔다. 


그렇게 1~2주가 지나고 친구 여럿이 모여 카페에서 진득하게 수다를 떨던 도중, 나랑 친구, 그 여자친구 셋이서 술을 마셨던 이야기를 하게 됐다. 나는 친구에게 정말 내가 실수한 게 없냐고 그제서야 물어봤고, 친구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잘못한 건 없었는데, 락(Rock) 이야기를 하다가 새소년 얘기에 너가 열변을 토하더라고.” 

“아 뭔 얘기 했는지 알겠다. 그 얘길 너 여자친구 앞에서 했구나. 젠장!!!!!! 안돼!!!!”


https://brunch.co.kr/@ilwrite/84


앞선 글에서 설명했듯 나는 밴드 새소년의 화려한 데뷔 이후의 행보가 생각보다는 지지부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이유란 정치적으로 다루어지는 이데올로기의 이미지가 창작자에게 입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생각은 누가 잘했다 잘못했다의 차원이 아닌, 그들이 음악이 아닌 다른 측면에서 폄하당하는 것에 대한 리스너로서의 개인적인 아쉬움이다. 이렇게 풀어서 얘기하는 데도 조심스러워지는 건 왜일까. 이제는 이와 같은 담론을 다루는 자체가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것으로 여겨질 정도로 각자의 입장들이 극단적으로 분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몇 년간 한국 인터넷 사회의 중심에 있던 논쟁이기도 하고. 


이런 얘기는 웬만해서는 대외적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많이 친한 친구 사이라면 괜찮겠지만, 몇 번 만나보지도 않은 사람 앞에서 이런 얘기를 그저 생각이랍시고 내뱉는 건 분명 예의가 아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술을 진탕 마시고 필름이 끊기고 나면 이런 얘기를 이야깃거리랍시고 꺼내곤 한다. 얻는 게 없는 걸 알면서도 술에 취한 나는 그 순간의 토픽을 이어가기 위해 이래저래 할 말 못 할 말 구분도 없이 다 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자면 다음 날 반드시 후회를 하게 된다. 



본성을 운운하는 사람들의 심리.


“술에 취하면 본성이 나온다.” 

사람들은 술에 취해 범죄를 저지르거나, 술을 먹고 개가 된 사람을 보며 이렇게 말하곤 한다. 뭐 완전히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나도 술에 취하면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것들을 무심코 말하곤 하니까. 하지만 해당 문장은 대부분의 경우, 무조건적인 비난을 위해 사용된다. 그래서 난 ‘술에 취하면 본성이 나온다.’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을 난도질하는 상상을 하는 A와 실수로 사람을 죽여버린 B. 누가 나쁜 사람일까? 여자를 혐오하며 기회의 공정을 부르짖는 20년대의 한 남자와, 여자는 집에 있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현모양처 아내를 아끼던 그때 그 시절의 한 남자. 누가 도덕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걸까? 본성의 좋고 나쁨은 누가 정할 수 있는 걸까? 


답은 쉽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공자, 노자, 순자, 수많은 철학자들이 본성을 규정하려 노력했지만 그 누구도 의견을 통합해내진 못했다. 본성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명확한 기준을 세울 수 없을 것이다. 본성은 아주 모호하고 추상적이고도 가벼운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성’이라는 단어를 자주 오용하곤 한다. 오용이라기보다는 악용을 한다고 해야 할까. 누군가는 ‘본성’이라는 단어의 모호함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려 든다. 왜? ‘본성’이라는 모호한 개념이 들어간 순간, 아무도 뚜렷하게 반박할 수 없으니까. 그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으니까. 그들은 그런 비겁한 방식으로 이미 벌어진 결과, 마음껏 욕할 수 있는 결과와 비교적 청결한 자신의 도덕적 우위를 번갈아 보며 하염없는 자위행위에 몰두한다. 누군가의 치부를 보고 흥분하고 비비고 꼬집고 주물럭대다 싸버린다. 내가 도덕적으로 낫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본성이라는 단어를 이용해, 술의 힘에 이끌려 잘못을 저지른 상대와 아직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자신과의 도덕적 우위를 한껏 벌리는 것이 그렇게 좋은가? 다른 이가 하면 본성, 자기가 하면 실수라고 할 게 뻔하다. 본성의 규정은 어렵고, 절대적인 악의 실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들은 자신의 세상 속에서 본인이 반드시 절대적인 선이 되고 말 테다. 그런 자들이 자신에 대한 기준이 엄격하지 않을 것임은 뻔한 이야기다. 


상상으로라도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나는 정말 없다고 본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게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나쁜 상상들을 대부분 상상에서 그치게 둔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내 생각대로 저질러버리는 게 생명체로서, 사람으로서 손해니까, 그래서 안하는 거다. 그게 이성적인 판단이고, 그게 사람의 본성이라면 본성이다. 득 될 것 없는 나쁜 짓을 근시안적으로 저질러버리는 것보다는, 내게 해가 되는 나쁜 생각을 억누르려는 소시민의 고단함이야말로 진정 사람답다면 사람다운 일이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시는 것 


다시 말하지만 본성에 대한 언급은 고찰의 결과보다는 결과에 따른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자주 사용된다. 그래서 나는 술에 진탕 취해서 필름이 끊기는 게 죽을 만큼 싫다. 다 같이 재밌게 놀았는데 나만 기억 못하는 게 억울한 것도 있지만, 언젠가 그러다 크게 잘못을 저지를 것만 같기 때문이다. 특히 그 잘못이 나의 본성으로 치부되어 매장될까 두렵다. 


“그러면 심신미약이니까 다 괜찮다는 거야?”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만일 누가 술을 먹고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 잘못의 원인이랄 것은 ‘실체가 없어서 욕하기 딱 좋은 본성’ 따위가 아니라, 자신을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술을 퍼마신 경솔함에 있다. 술을 먹지 않으면 이런 짓을 벌이지 않을 사람이었고, 평소에는 문제 행동을 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그 문제의 원인을 술에 취하면 맛이 가는 줄 알면서도 술을 퍼마셔서 자신의 이성과 신체를 통제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한 그의 경솔함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시는 행위는 자신의 신변을 전부 단기 기억 상실에 걸린 나에게 맡겨버리는 멍청하고도 조심성이 없는 짓거리다.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는 죄다 의식이 돌아온 내가 감내해야 한다. 기억에도 없는 내가 저질러 놓은 일에 대한 쾌락 없는 책임을 지게 된다는 말이다. 기억이라도 있으면 억울하지는 않을 테다. 


무단투기의 장이 되어버린 전봇대 아래에 마시던 메가커피 아메리카노 플라스틱 잔을 던져버리는 얄팍한 시민 의식을 가진 내가 혹여나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다음 날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여럿 죽여버린 살인마가 되어 있을까 무섭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차는 없지만) 앞서 말했듯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신다는 건 다음 날 주검으로 발견된다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며, 누군가의 인생을 파탄낼 정도의 죄악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랜덤박스를 여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그 랜덤박스를 자주 열어봤고, 그 결과가 누군가의 인생을 파탄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내 스스로가 깊은 자괴감을 느끼기에는 아주 충분한 일들이었다.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시는 건 상당히 위험하고도 한심한 잘못이다. 이걸 몇십 번은 필름이 끊겨보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무결하지 않은 인간이 정신을 잃을 만큼 술을 마신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그리고 무결한 인간이란 세상에 없다. 그러니 웬만하면 술 좀 줄이고, 결단코 필름은 끊기지 않도록 하자. 쉽지는 않겠지만. 제발. 나한테 하는 말이다. 





*이 글을 쓰던 어느 날, 또 필름이 끊겨버리고 말았다. 개가 똥을 끊지… 그래도 좀 제발 술 좀 적당히 마시기 위한 노력은 계속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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