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작년 9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약 31일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발행했던 뉴스레터 [From Santiago]를 공개하는 글입니다. 1편부터 차례대로 읽어나가시길 권합니다.
Day 13. 카스테야노스 데 카스트로(Castellanos de Castro) → 비얄카사르 데 시르가 (Villalcázar de Sirga) / 49.6킬로 / 6시간 38분
메세타 평원 산꼭대기에서 밤을 보내고 출발하려는데 매우 깜깜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고 동물소리가 들리니 쉽게 발걸음이 안 떨어지는 거다. 게다가 우리는 헤드랜턴도 없는 상황. 조금 눈치를 보고 있자니 다른 사람들이 하나 둘 랜턴을 쓰고 나온다. 이때다 싶어 잽싸게 따라나섰다.
산꼭대기에서 2km 정도 떨어진 온타나스(Hontanas)에서 아침을 먹고 8km를 더 걸었다. 어제 메세타의 여파에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아 뭔가 먹으면서 쉬었다 가기로 했다. 진작에 다 먹었건만 미적거리던 그때,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어! 다솔님!” 어제 우리와 똑같이 메세타를 걸은 다솔님은 더위를 먹어 도저히 걸을 수 없어 택시를 타러 왔다고 했다. 빨리 걷고 싶은 마음에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그 구간을 통과했더니 일사병에 걸렸다고. 우리도 그랬다며 얘기를 나누는 사이 택시비를 나누어 내고 다솔님이 가는 곳까지 가기로 했다. 응?
원래는 30km 떨어진 보아딜리아 델 까미노(Boadilla de Camino)가 목적지였다. 여기서 20km 정도 남은 상황이었는데 메세타 구간은 그늘도 없고 지루하니 좀 건너뛰어도 괜찮겠다 싶은 유혹이 스멀스멀. 결국 다솔님이 가시는 프로미스타(Fromista)까지 같이 택시를 탄 후, 거기서 12km 정도 더 걷기로 했다. 걸은 거리는 총 22km지만, 실제 이동한 거리는 약 50km 정도. 이렇게 산티아고 도착 일정이 하루 앞당겨졌다. 응?
그래서 일사병과 택시구간점프의 필연이 겹쳐 에피소드가 전혀 없었던 오늘, 스페인 속 순례길 음식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어느 나라를 가나 큰 재래시장, 빈티지 시장, 대형마트를 꼭 가볼 정도로 식재료와 음식에 관심이 많은데 순례길 음식도 흥미로운 요소가 꽤 있다.
보통의 아침. 스페인은 감자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라 감자와 계란으로 만든 스페인식 오믈렛, 또르띠야(Tortilla)나 구운 빵인 토스타다(Tostada). 크루아상과 크림이나 초콜릿이 들어간 패스츄리. 카페 에스프레소나 카페 꼰 레체(Cafe con Leche, 카페라떼). 주모 데 나란자(Jumo de Naranja, 생 오렌지주스)까지 4가지 정도의 음식과 음료를 먹고 마신다. 기호에 따라 음식은 하나만 선택하지만 음료는 꼭 커피와 오렌지주스 두 가지를 모두 마신다.
스페인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횡단하다 보니 여러 지방을 거치는데 나름 아침을 챙겨 먹는 재미가 있다. 사실 먹지 않으면 진짜 걷기 힘들다. 특히 아침에 탄수는 필수다.
거쳐가는 지방에 따라 또르띠야에 들어가는 재료, 모양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먹어보는 것도 순례길의 큰 재미다. 또르띠야의 기본은 감자와 계란이고 거기에 햄, 초리조, 참치, 야채 등이 추가된다. 어디는 되게 두껍고 어디는 계란부침처럼 나오기도 한다.
커피는 한국에 비해 조금 묽은 편이라 대부분 보리차 같은 구수한 맛이 난다. 만약 우리나라 라떼처럼 진하게 마시고 싶다면 카페 코르타도(Cortado)를 주문해야 한다. 커피도 신기한 게 자치주가 바뀔 때마다 원두 브랜드가 바뀐다.
스페인은 점심식사가 메인인 문화를 가진 나라다. 점심을 거하게 먹고 저녁은 먹지 않거나 샐러드로 간단하게 먹는다. 그래서 점심 예약이 풀인 경우가 많다. 인기가 많은 맛집은 점심에 그냥 가면 못 먹고 돌아서는 경우가 다반사. 예약도 보편화되어있는 문화다.
점심을 배불리 먹고 나면 뜨거운 태양을 피해 씨에스타(낮잠시간)가 시작된다. 은행, 음식점, 카페, 슈퍼까지 몇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문 닫는 것이다. 그래서 식당은 점심영업을 하고 씨에스타(낮잠시간)에 맞춰 쉬는 시간을 가진다. 모두 점심을 거하게 먹고 뜨거운 태양을 피해 쉬는 것이다. 그리고 느지막한 저녁영업을 시작한다. 보통 4~5시에 오픈하지만 식사전문 식당은 8시에 오픈하기도 한다. 4~5시에 오픈하더라도 식사주문은 6~7시부터 가능한 곳이 많다. 그래서 순례길에서 힘든 것 중 하나는 밥 먹는 시간을 맞추는 일이다.
보통 새벽 6시 반에 출발해 1~2시에 도착하는데 2시가 되면 문 여는 식당이 없어 제대로 된 밥을 먹으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그나마 대도시는 3시까지 하거나 작은 메뉴(타파스, 핀초스 등)는 식사가 가능해서 다행이지만 작은 마을은 굶거나 빵, 과자, 과일로 때울 수밖에 없다.
만약 대형마트(Dia, Gadis, Eroski)가 있는 도시라면 직접 사다 해 먹거나 완제품을 사서 데워먹을 수 있다. 여기는 마트 물가가 싼 편이라 주방이 있는 알베르게라면 되도록 해 먹었다. 싸고 질 좋은 재료가 많이 나는 나라라 직접 요리하는 재미가 있다.
특히 생 토마토는 스페인의 강렬한 햇살을 받고 자라 정말 맛있다. 토마토, 양파를 다져서 부라타 치즈를 올리고 올리브오일과 소금만 뿌려도 훌륭한 식사가 된다. 토마토, 양파, 부라타 치즈를 1개씩 사도 7천 원이 채 되지 않는 가격! 덕분에 부라타 치즈를 맘껏 먹었다.
한식이 너무너무너무 그립다. 간장게장, 콩국수, 평양냉면 먹고 싶고요. 한국에 가고 싶은 건 아니지만 찰기가 흐르는 쌀밥이 먹고 싶다. 나름 여러 나라 여행 다니면서 먹을 걸로 힘들었던 적은 없었는데 스페인에서는 맛집 찾기가 어렵고 맛있다고 해도 금방 물리더라 - 생각보다 간이 되어있지 않고 음식에서 다채로운 맛이 나지는 않는다. 보통 소금으로만 간을 하기에 짠 경우가 많고 토마토소스도 볼로네제가 전부다.
닭고기나 돼지고기 스테이크도 역시 올리브오일과 소금간이 전부. 우리나라 음식처럼 감칠맛을 내기보다는 올리브오일, 발사믹, 토마토 등 원물의 맛만으로 음식을 살리는 편이라 그렇다고 한다.
정말 좋은 재료들이 산지에서 나기 때문에 그대로의 맛을 살리고 스페인 사람들은 맛있다고 생각하며 먹는다는 것! 아 오해는 마시라. 꽤 맛있게 먹었던 요리들도 있는데 다음에는 맛있었던 음식들을 데리고 와보는 걸로! 하지만 여기 있는 동안 보통 1년에 먹을 라면을 다 먹었다는 건 안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