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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 Aug 04. 2024

16. 길을 걷는 단정한 삶

본 글은 2023년 9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약 31일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발행했던 뉴스레터 [From Santiago]를 공개하는 글입니다. 1편부터 차례대로 읽어나가시길 권합니다.




Day 14. 비얄카사르 데 시르가 (Villalcázar de Sirga) →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 32킬로 / 9시간 7분


비얄카사르 데 시르가(Villalcázar de Sirga)에서 출발하는 새벽


벌써 길 위에서 2주가 지났다. 굳이 그토록 힘들다는 이 길을 왜 걷는지 아직도 모른다. 그저 일어나서 걸을 뿐이다. 매일 가족단톡방에서 아빠는 몇 킬로를 걸었는지 묻고 나의 끼니를 확인한다. 엄마는 나의 건강을 챙긴다.


산티아고에 가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혼자 생각하는 것도 좋고, 걷는 것도 다 좋은데 꼭 거기까지 가서 걸어야겠느냐고 했다. 여기서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네가 지금 해야 하는 것이 그것이 맞냐고. 왜 고민하지 않았겠는가. 맞는지 틀리는지 눈뜰 때부터 감을 때까지 고민했다. 이직도 준비해야 하고 내년이면 만 서른다섯(쓰면서도 믿기질 않네) 이대로 지낼 것인가 싶고. 무슨 자신(?) 감인지 나는 가야만 하겠다고 대답했다.

엄마 왈, 그래 뭐 말린다고 들을 애가 아닌 건 아는데 걱정은 되니 말이나 한번 해봤다  하시더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실제로는 울면서 대답했다. 아, 엄마가 아니고 내가.



그러니 나는 이 길에서 무어라도 쥐고 돌아가야 했다. 주변사람들에겐 웃으면서 산티아고에 가기로 결정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웃고 있지 못했다. 그렇게 떠나왔는데 그저 걷고, 빨래하고, 먹고, 자고, 일어나기만 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퍼뜩 들었다. 여기 와있는 동안 인스타그램을 하루 10분 이상 하지 않기로 했는데 그 짧은 10분에도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업을 잘 가꿔나간다는 소식들이 쓱 스쳐 지나간다. 그럼 또 한 번 마음이 내려앉기도 했다.



한국에서의 상황을 다 잊어버린 채 그저 걷고만 있으면 뭐가 해결될까? 그저 걱정과 결정의 시점만 뒤로 미뤄둔 채 시간낭비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여기 있어도 되는 걸까? 사실 한국에서 죽어라 더 달렸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고.



그렇게 시선을 땅에 고정하고 걷다가 위아래로 차오르는 햇빛의 열기에 겉옷을 벗고 달아오른 볼을 식히려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늘 하나 없는 대지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순례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모두 어디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생각하다 이내 의미 없지 싶어 피식 웃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이렇게나 덥고 힘든데 왜 매일 이 길을 걷는 게 좋은 걸까?


이 길을 걸어야 하는, 매일의 할 일이 있는 게 좋은 거구나. 내 손에 쥐어진 게 없는 것 같아도 매일 아침 일어나 나의 길을 떠나는 주어진 하루를 충실히 감당해내고 있는 것. 이것이구나. 순례길에 오르고 나서 나의 하루 삶이 아주 단순해졌다. 하루에 나의 본분, 할 일이 있는 것이 주는 안정감. 그렇게 단정해진 삶은 더 넓은 것을 가져다주겠구나. 지나온 어제는 미련 없이 보내고 주어진 오늘을 충실히 살아낼 것. 그리고 다가올 내일의 길을 기대하는 것.


한국에서의 상황을 잊은 게 아니라 나의 삶, 하루로 돌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구나. 나의 매일을 어떻게 써야 하고 가꿔야 하는지. 나를 어떻게 수용해줘야 하는지 삶을 재정립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그러니 단정해진 만큼 더 넓어진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내가 가야 할 곳을 향해 남은 길도 걸어가 보자고.






Post Card

곳곳에 순례길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한 마을에 그려진 엄청난 순례자 벽화


산티아고까지의 키로수가 적힌 표시석


산티아고까지의 키로수가 적힌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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