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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 Aug 19. 2024

17. 스페인에서의 보름달 그리고...

본 글은 2023년 9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약 31일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발행했던 뉴스레터 [From Santiago]를 공개하는 글입니다. 1편부터 차례대로 읽어나가시길 권합니다.




Day 15.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Bercianos del Real Camino) / 30.6킬로 / 7시간 12분



메세타 고원을 시작으로 이어지는 ‘메세타 구간’은 아직도 끝나려면 한참 남았다. 템플기사단의 마을이었다는 어제의 숙소를 떠나 새벽 6시 반 오늘의 발걸음을 디뎠다. 길을 나서자 보이는 훤한 보름달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사진에 잘 담기지 않았지만 저 밝은 빛, 태양이 아니고 둥근 보름달이다. 고퀄의 CG 같았다. 정말 크고 훤한 보름달이 아주 가까이서 빛나서 길을 걷는 누구도 헤드랜턴이 필요 없을 정도. 달에 순례객들의 그림자가 짙게 생겼으니 얼마나 훤한지! 훤한 보름달에 타지에서 받는 추석인사가 반가운 아침, 어제의 생각이 무색하게 기분마저 훤해졌다.




나의 속도를 깨닫는 것

한국에서 벗어나니 좋은 것은 잠시뿐, 현실의 생각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고 더 빨리 바뀌어 가고 있었다. 나의 상황도 그러했다. 지금은 물론 앞으로 나의 1년이 어떻게 될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다. 10년 동안 해오던 일을 계속할 것인지, 새로운 일을 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선택지가 있는지. 다음 목적지를 정하기에 고려해야 할 조건이 많았다. 하지만 고민하는 새 시간은 흐르고 주변은 저 멀리 앞서 나가는 것 같더라. 그들의 그림자가 겹겹이 내 앞에 있다고 초조해질 때 즈음 이 길에 올라탔다.


나를 둘러싼 것들로부터 한 발자국(이라고 하기에는 좀 멀지만) 떨어진 것이다. 걷는 일은 즐거우나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는 나를 곱씹는다. 한 걸음에 나의 작고 사소한 감정과 생각 한 톨까지 꾹꾹 눌러 담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하나 디테일을 보기 시작하니 많은 것이 달라졌다.



걸을 때 타인의 그림자를 보며 걸으면 무리하게 되고 오래 걸을 수 없다. 속도가 가늠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개를 바로 들고 내가 가야 할 곳을 보아야 무리하지 않고 오래 걸을 수 있다. 결국 나를 지나쳐 가는 것 같은 세상과 타인의 빠른 속도 속에서 살아남는 것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속도를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주변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가야 할 곳을 보고 나의 속도를 조절해야 오래, 끝까지 걸을 수 있는 것이다. 걷는 순간마다 길을 걷는 것과 삶이 많이 닮아있다고 느끼는데 그래서 인생을 인생길이라고 부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모두의 삶에 현실의 불안과 초조함보다 각자의 길을 선택하는 용기와 즐거움이 더 크기를. 인생을 걸어가는 우리들 저마다의 속도가 어떨지 몰라도 결국 모두가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것처럼 삶을 걸어내기를. 그러니 모든 순간 마음을 다해 서로 응원하는 사이가 되자.






Post Card

점점 밝아오는 태양에 더욱더 몽환적이 되어가던 보름달. 이 날은 유독 큰 탓에 오전 8시가 되어도 달이 사라지지 않았다.


앞으로는 보름달이, 뒤로는 밝아오는 태양이 한시 한 공간에 펼쳐진 스페인의 대지  


숙소에 도착해서 씻고 나와 수분보충. 또 메세타야…? 메세타와 더위의 콤보에 져버리고 말았으니까 깔리모초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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