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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 Aug 29. 2024

18. 낭만에 대하여

본 글은 2023년 9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약 31일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발행했던 뉴스레터 [From Santiago]를 공개하는 글입니다. 1편부터 차례대로 읽어나가시길 권합니다.




Day 16.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Bercianos del Real Camino) → 렐리에고스(Reliegos) / 20.4킬로 / 5시간 33분



스페인의 새벽녘




햇반만을 기다렸다

어젯밤부터 손꼽아 기다린 오늘. 알림도 없이 눈이 번쩍 떠진 건 햇반을 판다는 마을을 지나가기 때문이다. 아침으로 꼭 먹으리라 다짐하고 오픈시간도 미리 확인하는 철저함을 자랑했지 뭔가. 여기 와서 제일 생각나는 음식은 단언컨대 쌀밥이다. 흰쌀밥!






스페인의 쌀은 윤기 나 찰기가 없다. 그래서인지 리소토나 볶아서 눌린 빠에야, 쌀을 끓인듯한 느낌의 밥 메뉴가 주인 듯하다. 온 지 얼마 안 되어 쌀을 사다가 냄비밥을 한 적이 있는데 쌀이 익기까지 오래 걸리고 우수수 떨어지는 볶은듯한 밥이 되었었다. 거기에 양송이버섯을 잘라 넣고 그나마 비행기에서 남겨놓은 참기름을 넣으니 약간은 솥밥 느낌을 낼 수 있었지만 못내 아쉬웠었다.


그 뒤로 딱히 밥은 도전하지 않았었는데 햇반과 라면을 판다니 도저히 지나갈 수가 없는 거다. 햇반 하나에 이렇게 순례길이 행복해지다니! 가격은 사악하지만 이 길에 가격이 대수냐. 라면 5.5유로(약 7,700원), 햇반 4유로(약 5,600원) 실화니? 김밥천국 가면 5~6천 원이면 되고 마트 가면 3천 원인데.


가게 앞 테라스 자리부터 한국인들이 많았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눈빛만으로도 그 마음을 안다는 듯 흐뭇한 얼굴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먼저 라면에 밥을 드시던 한국인 부부분께서 마침 잘 왔다, 많이 먹지 못한다며 본인들의 햇반을 주시기까지. 덕분에 계란 푼 신라면과 쌀밥을 호로록 해치웠다. 저 밥을 먹었을 때의 감동이란.. 잊지 못할 한 입이었다. 한국인은 역시 밥이지! 밥심으로 남은 길 거뜬히 갈 수 있어!





낭만과 함께 걷는 길

우쿨렐레 연주에 노래하며 가는 두 순례자


밥을 든든히 먹고 끝도 보이지 않는 길을 계속 걸을 때였다. 어디에선가 노랫소리가 들리는 거다. 푸드트럭이나 쉼터가 있나 싶었는데 길 한가운데서 나타나는 노래의 주인공. 우쿨렐레를 들고 노래하며 걸어가는 낭만언니(사진 오른쪽)가 있었다. 가다 보면 늘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모두와 얘기를 나누진 않으니 나름의 애칭을 붙인다. 그중 하나가 저 낭만언니! 길고 지루한 길에 지친 순례자들에게 잠깐의 활력을 선사하듯 노랫소리가 지나가는 거다. 모두가 손뼉 치며 몸을 흔든다. 걸음이 절로 경쾌해지고 미소를 지으며 힘을 얻는다. 잠시 쉼터에서 쉬는 틈에 우리를 스쳐 지나간 낭만언니를 쫓아 발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워낙에 길이 지루한 탓이었다.



동행 : 빨리 가자. 낭만이랑 같이 가야 덜 지루하겠어.

나 : 저 언니 걸음이 꽤 빠른데?

동행 : 그러니까 빨리 가야지. 근데 쫓아가기 쉽지 않네.

나 : 그냥 걷자. 계속 걷다 보면 어느새 낭만이 앞에 와있을 거야.

동행 : 오? 좀 하는데? 낭만을 쫓아가려 낭만 없이 걷는 현대인들이네

나 : 맞네. 낭만을 쫓아가려 낭만 없이 걷는 우리.




그래. 낭만을 쫓으려다 정작 낭만 없는 과정을 보낸 적이 한두 번이던가. 낭만을 가지려 애를 쓰지만 낭만은 가지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거나 누리는 것이리라. 스스로 낭만을 정의하고 종류와 크기에 상관없이 내 것으로 받아들여 누리는 것이 지금의 시대에 나로서 존재하는 하니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사실 낭만이란 단어는 동양권에 없던 단어라고 한다. 이 말을 처음 만들어 낸 것은 일본에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유명한 작가 나쓰메 소세키이다. 불어 로망스를 사용하기 위해 일본식 발음에 따라 한자어로 급조해 표기한 것을 그대로 읽은 게 굳어진 것이라고. 아주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단어라고 하니 이것도 제법 낭만적인 일일지도.


그러니 낭만의 사전적 정의나 시대적 흐름은 생각지 말자. 내가 낭만이라 여기고 누리는 것들이 낭만인 거다. 나를 풍요롭게 하고 존재하게 하는 낭만을 열심히 누려보자. 그리고 그 낭만을 공유하는 거다. 낭만을 쫓지 말고 누리는 낭만클럽을 열어볼까? 여러분의 낭만은 뭐가 있나요? 뭐든, 어떤 거든 좋습니다. 여러분을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하는 낭만을 알려주세요. 오늘의 길은 나의 존재를 있게 하는 낭만으로 가득 채워볼게요.






Post Card

라면에 밥까지 먹었지만 메세타 구간의 지루함은 견디기 어렵다


위와 같은 길 같겠지만 다른 시간, 다른 길이다. 찍힌 사람은 똑같은 게 함정.


평원에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저렇게 춤을 춘다. 그리고 우리들은 똑같은 이 길을 계속 걷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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