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작년 9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약 31일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발행했던 뉴스레터 [From Santiago]를 공개하는 글입니다. 1편부터 차례대로 읽어나가시길 권합니다.
Day 12. 부르고스(Burgos) → 카스테야노스 데 카스트로(Castellanos de Castro) / 29.1킬로 / 6시간 22분
부르고스(Burgos)에서 쉼을 누리고 다시 길을 걷는 날. 이제부터 본격적인 ‘메세타 구간’이 시작된다. 이 구간은 ‘메세타 고원’ 또는 ‘메세타 평원’이라고 불리는 고도가 높으면서 매우 평탄한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높은 산 위에 끝없이 평평한 땅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메세타 고원은 부르고스(Burgos)에서 온타나스(Hontanas)까지의 구간을 말하지만 우리는 그 앞마을까지만 걷기로 했다. 그 앞마을, 메세타 고원의 가장 높은 곳에 단 하나의 알베르게가 있는데 고도가 높아 일몰과 별들이 아주 아름답다고 해서 그곳에서 묵어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순례자들 사이에서 ‘메세타 구간’은 악명 높다. 평탄하지만 그늘이 하나도 없는 구간이 적게는 16km, 길게는 20km씩 이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구간에는 그 흔한 바(Bar)도 없다.
높은 악명과 달리 처음 마주한 메세타는 너무 멋있었다. 분명 풍력발전기가 내 눈높이에서 보일만큼 고도가 높은데 끝없는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고 푸르른 하늘이 매우 가까웠다. 세상의 중심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끝도 없는 푸르름이 내 눈을 가득 채웠다. 심지어 구름 한 점 없는 좋은 날씨까지.
하지만 그렇게 걷다 보면 고도가 높은 만큼 강렬한 스페인의 태양으로 온몸이 열기에 휩싸인다. 뜨겁다 못해 따가움으로 달아오르며 눈조차 제대로 뜨기 어렵다. 체력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한계가 오기 시작한다. 내가 길을 걷고 있는 건지 길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 건지. 따가운 태양에 겉옷을 입으면 찜기처럼 열이 오르고, 더워서 겉옷을 벗으면 살갗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주저앉아 쉬고 싶어도 쉴 데가 없다. 분명 평지인데 어째서 더 길게 느껴지는 건지. 사막을 헤매는 것처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무언가 보이길 기대하며 계속 걸을 뿐이다.
목적지를 향해 아무리 걸어도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기대에 기대를 거듭하며 평원을 계속 걷는데 저 멀리 보이는 지붕 하나.
“저거야?”
“맞아?”
"맞는 거 같아!"
오후 3시의 강렬한 태양에 신기루처럼 건물이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나타나더라. 홀린 듯이 들어가 가방과 신발부터 벗고 레몬맥주(까냐 꼰 리몬)부터 주문하고 들이켰다. 참 이곳의 와이파이 비밀번호는 oasis. 비밀번호 센스(?) 기가 막히다.
와... 정말 죽을 것 같았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도르마무를 백번은 외친 것 같은 똑같은 풍경, 그늘이 하나도 없는 탁 트인 시간과 정신의 길에 이제 막 입장한 것이다.
사방으로 밀밭이 펼쳐지고 지평선 위의 하늘과 그 아래의 땅, 딱 이 둘 뿐인 길. 모든 자연의 응축 속에서 나는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대지 위에서의 작은 나라는 존재는 내일도 이 평원을 걸어야 한다. 지금 아는 것은 하나다. 오늘도 해냈고 내일도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지금의 나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