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란 Jun 22. 2023

당신과 나의 거리, '저만치'

김소월의 시 '산유화'와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한국 현대시를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고등학교 때까지 입시를 준비하면서 읽었던 많은 시들은 무척 아름다웠다고 기억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김소월의 시 '산유화'다. 여태까지 읽어본 한국 현대시 중 가장 서정시다운 서정시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단순하고 짤막하여 함축적이면서도, 노래로서 갖추어야 할 운율은 빈틈없이 갖추었고, 선명한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으며, 담고 있는 주제의식 또한 무척 뚜렷하다. 소박한 표현에 커다란 의미를 담은, 마치 담백한 달항아리를 떠올리게 하는 시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에 꽃이 피어있다. 계절의 흐름에 연연하지 않고,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다. 산에서 우는 새는 꽃이 좋아 산에서 살고 있지만, 계절의 흐름에 따라 꽃이 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새가 꽃을 아무리 좋아한들, 꽃이 될 수는 없다. 꽃과 새는 별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꽃과 새는 항상 '저만치'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 이 시는 산으로 상징되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각각의 개체가 영원히 합일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절대적 고독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시는 총 4연으로 이루어져 있고 시종 담담하게 진행되는데, 이 중 가장 인상적인 구절은 2연이다. 2연 중에서도 '저만치'라는 단어는 그 폭발력과 응집력이 엄청나다.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지만 필연적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 '저만치'라는 단어 안에 들어있다. 이 거리는 아주 먼 것도 아니면서 결코 가 닿을 수는 없는, 아주 애매한 거리다. 한 마디로 감질나는 거리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지만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거리. 이 단어는 한 마디로 안타깝다. 닿을 것 같은데 닿지 못해서, 한 몸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결국 별개의 존재여서.


얼마 전에 앤드루 포터라는 영미 소설가의 단편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읽었다. 모든 단편이 두루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니나, 표제작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 주는 충격이 엄청났다. 왜 이제야 읽었나 하는 생각마저 했다. 하루를 꼬박 그 책에, 정확히는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단 한 편에 매달렸다. 주인공 헤더와 로버트, 콜린에 대해 생각했다. 헤더와 로버트의 관계, 헤더와 콜린의 관계, 헤더의 마음. 머릿속과 마음 속이 마구 휘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소설의 내용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대학생이던 헤더와 노교수인 로버트의 비밀스러운 만남, 헤더와 콜린의 결혼, 그 후로도 이어진 헤더와 로버트의 만남, 콜린에게 이 만남이 발각된 후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 소설은 겉으로는 헤더와 노교수 로버트의 비밀스러운 만남이 불륜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발각되어 좌절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즉 지저분한 불륜 스토리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읽어보면, 너무나도 다른 자아를 가져 서로 온전히 이해되지 못하는 개별자들의 뼈시린 고독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헤더가 로버트를 처음 만나게 되는 계기인, 무척 어려운 방정식 문제가 상징하는 것이, 바로 존재의 불가해함이다. 서로 영원히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개별자들의 모습.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바닥까지 이해할 수 있는가. 소설은 아니라고 말한다.


소설 중반부까지 묘사되는 헤더와 로버트의 비밀스러운 만남, 헤더가 그로부터 얻는 정서적 만족감에 대한 내용 때문에, 이 소설이 그 질문에 긍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소설은 철저하게 헤더의 입장과 심리만을 묘사하고 있고, 로버트에 대해서는 거의 서술하지 않는다. 로버트의 전사는 거의 드러나 있지 않으며, 로버트의 심리 또한 자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이를 통해 헤더가 로버트에게 온전히 이해되었는지를, 독자는 알 수 없다. 헤더는 정서적으로 만족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 또한 착각일 수 있다. 이 소설에 로버트의 마음은 거의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헤더와 콜린의 사이는 말할 것도 없다. 헤더는 애초에 콜린에게 자신을 다 내보이지 않았다. 로버트와의 만남을 숨긴 채 결혼했기 때문이다. 콜린을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헤더는 결혼 후의 현실을 헤아려보고 콜린을 선택했다. 의사의 부인으로 사는 미래가 자신의 현실 생활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애초에 헤더는 콜린에게 정서적 만족을 바라지 않았다. 소설에서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까지 한다. 이들은 부부이지만 결코 서로의 바닥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몸은 함께 살지만, 마음은 각자 고독하다. 그러니까 이들은 '저만치' 떨어져 있다. 산이라는 배경 안에 담겨 있지만 '저만치' 떨어져 있는 새와 꽃처럼, 각자 고독하게 있다.


이들 각자의 고독은 끝내 해결되지 못한다. 헤더와 로버트의 만남이 콜린에게 발각되고, 결코 현실의 안락함을 포기할 수 없었던 헤더는 끝내 로버트와 다시 만나지 못한다. 로버트가 죽을 때까지. 로버트의 죽음을 안 헤더는 혼자 울음을 터뜨리고, 이 울음소리를 콜린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들은 로버트가 죽고 나서도 각자의 고독을 떨치지 못한다. 헤더의 울음소리를 콜린이 들었는지, 소설은 끝까지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콜린이 헤더를 위로하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헤더는 혼자 울었다. 헤더와 로버트의 비밀스러운 만남과 대화는, 이제 헤더 혼자만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태어나 성장하면서 독립된 자아를 형성하고, 한 사람의 존재가 된다. 가족과 함께 살지만, 가족에게 가장 많이 의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라는 존재가 언제나 가족에게 온전하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부모-자식 간, 형제-자매 간에도 그럴 것인데, 하물며 각자 다른 가정과 사회 환경에서 성장한 연인이나 친구, 부부 관계는 오죽할까. 우리는 영원히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나의 사고방식과 너의 사고방식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졌다 한들, 절대 같지는 않다. 어딘가는 반드시 다르다. 우리는 모두 별개의 자아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딱 '저만치' 떨어져 있다.


이따금 우리는 외롭다고 느낀다. 한 집에서 함께 사는 이가 있어도 그렇다. 이 절대적 고독은 영원히 해소되지 않는다. 이리저리 일렁이는 나의 마음을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는 스스로조차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한다. 그럴 때 외로움을 느낀다. 이 외로움을 정확한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도 어렵다. 누군가에게 터놓고 이야기하기도 겸연쩍다. 결혼도 했는데(애인도 있는데) 뭐가 외로워? 그러나 이 고독은, 아무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라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개별자이기 때문이다. 혼자 빛나는 별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합일할 수 없는 꽃과 새이기 때문이다.


가끔, 꿈을 꾸지 않았는데도 그저 자다 깰 때가 있다. 조용하고 어두운 방에서 눈을 뜨면 눈앞은 온통 새카맣다. 온전히 혼자인 시간이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무언가가 눈앞에 있는 것 같아 손을 뻗는다. 정말 눈앞에 있는 것 같은데, 손 뻗으면 꼭 닿을 것만 같은데 절대 닿지 않는다. 사랑이, 인연이 그렇다. 성취나 목표, 완성이 그렇다. 마음이 그렇다. 글이나 말도 그렇다. 아름다움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저만치'의 거리를 두고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안타깝고 그립고 사무치는 마음으로 손을 거둔다. 먹먹한 마음으로 다시 눈을 감는다. 실은,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손 뻗어 바로 가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귀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이, 시간이 그렇다. 우리 모두가 공평하게 가진 것이나, 언젠가는 반드시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한하기 때문에 아름답고, 단 하나이기 때문에 빛난다. 우리가 가진 외로움은, 실은 그래서 사무치게 아름답다. 우리가 모두 개별자이기 때문에, 혼자 빛나는 별이기 때문에, 영원히 합일할 수 없는 꽃과 새이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그 사실이 우리를 견디게 한다. 끝내 살아가게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외로움도 썩 견딜 만한 것이 된다. 김남조는 시 '설일(雪日)'에서,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 하늘만은 함께 있어주지 않던가'라고 말했다. 김소월의 시 '산유화'에서 영원히 합일할 수 없었던 꽃과 새는, 실은 산이라는 공간에 안겨 있다. 우리는 모두 개별자이지만,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한다. 그 사실이, 우리를 영원히 위로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