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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 Jun 23. 2023

잃어버린 것을 애도하는 마음

김영하의 <작별인사>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예전에 필기구덕후인 지인에게 특이한 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온갖 필기구를 사모으고 그것들로 이것저것을 쓰는 것이 취미이자 낙인데, 펜촉이 다 닳아 글씨가 토막날 때, 그러니까 펜을 다 써갈 때쯤, 펜에게 작별인사를 한다고 했다. 빈 종이에 다 끊어져 가는 펜으로 안녕, 잘 가, 그동안 수고했어, 정말 고마웠어, 같은 말을 쓴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는 역시 너답다고, 참 귀엽다고 웃었는데, 그 지인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그 이야기를 곰곰이 돌이켜 생각해보니, 애틋한 기분이, 아련한 마음이 들었다. 그 후로는 나도 가끔, 펜을 떠나보낼 때 그 지인과 같은 의식을 치른다. 안녕, 잘 가, 고마웠어.


회자정리 같은 낡은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경험해 알고 있다. 지금의 사랑이, 우정이, 슬픔이나 아픔, 기쁨이, 그렇게 거창하게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가 아끼는 물건들, 예를 들면 예쁜 가방이나 책, 추억이 담긴 사진, 이런 것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안다. 무언가, 누군가를 얻은 적이 있다면, 반드시 떠나보내는 날이 있다. 심지어는 항상 곁에 있는 혈족들마저,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삶은 무언가를 꾸준히 떠나보내는, 잃어버리는 과정인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한없는 슬픔에 잠긴다. 왜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을까. 허무해지기도 한다.


장례를 치러본 적이 있다면 알겠지만, 보통 사람을 떠나보내면 짧게는 3일, 길게는 5일 정도의 애도기간을 갖는다. 불교에서는 49재라고 해서, 7일씩 7번의 재를 지내기도 한다. 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한 사람이 죽은 후,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 죽음에 대해 수습해야 할 것들이, 관련하여 만나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깨닫고는 혼란스러워 한다. 옛말에 관혼상제라는 말이 있다. 장례가 인생의 큰 네 가지 사건 중 하나라는 뜻이다. 그 정도로 사람을 떠나보낸다는 것은 무척 큰일이다.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은 당장 마음놓고 슬퍼할 여유가 없다. 너무 많은 일들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이 심지어 49일씩이나 장례를 치른 것은, 그래서이다. 넉넉히 애도하기 위해서.


얼마 전에 김영하의 장편소설 <작별인사>를 읽었다. 이 소설은 얼핏 SF의 형식을 띤다. 인간 외에 안드로이드 로봇들이 등장하고 그들끼리 화합하고 갈등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시·공간적 배경도 현실 세계보다는 미래의 가상공간을 택했다. 아무래도 최근간이라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한 줄거리를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직접 읽어보시라, 그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흥미롭고 흡인력 있는 소설이다), 대강 소개하자면, 스스로를 인간인지 안드로이드 로봇인지 규정할 수 없어 혼란스러워 하는 철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세계와 맞부딪치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의 제목이 '작별인사'인 이유는 소설 마지막에 나온다. 마지막 두어 장에 걸쳐 철이가 세계와 삶에 보내는 인사가 무척 아름답고 처연하다. 작가는 SF의 형식을 빌려, 실은 인간의 삶과 세계라는 거대한 주제를 무척 깊이있게 다룬다. 개인적으로는 최근에 읽은 한국 현대소설 중 가장 인상적인 소설이었다.


이 소설을 읽고 어쩔 수 없이 떠오른 것은, 역시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였다. 이 소설은 작가가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 이야기를 뼈아프게 다룬 <소년이 온다> 이후 긴 침묵 끝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제주 4.3. 사건의 희생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어떤 아픔을 겪었는지, 현재도 겪고 있는지에 대해 차분하게 이야기한다. 초반부터 중반부까지만 보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경하와 인선처럼 보이지만, 소설을 계속 읽어가다보면 진짜 주인공은 인선의 부모님과 그의 친척들, 그러니까 제주 4.3. 사건 당시 직접 피해를 입은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경하는 소설가로, 작품을 내놓은 후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다가(이 모습에서 우리는 한강을 읽어낼 수 있다. 그는 <소년이 온다> 집필 중과 그 이후에, 아마도 경하처럼 지독하게 아팠을 것이다) 인선의 연락을 받는다.


인선은 손가락이 절단된 채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예전에 경하와 함께 구상했던 설치 작품인 '작별하지 않는다'를 제작하던 중 사고를 당한 것이다. 경하는 개인적인 아픔 때문에 이미 그 작품에 대한 의지를 상실한 채였기 때문에, 인선의 그같은(병적으로까지 보이는) 의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경하에게 인선은, 당장 자신의 제주 집에 가서 반려동물인 새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한다. 경하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며 어쩔 수 없이, 폭설이 내리는 제주로 향한다. 그 후의 이야기는 무척 신비롭고, 어찌 보면 황당한 느낌이 든다. 경하가 도착한 제주 집에 인선과 죽은 새가 있기 때문이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인선이 어떻게 제주 집에 먼저 도착해 있는지, 소설은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는 서사의 개연성이나 핍진함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강은 왜 경하와 인선의 설치 작품의 제목을 '작별하지 않는다'로 설정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 소설 또한(김영하의 <작별인사>처럼) 제주 4.3. 사건의 희생자들과 그 주변 사람들이, 지난 무참한 시간과 그들이 겪은 무수한 아픔들에 대해 긴 작별인사를 보내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설치 작품의 제목은, 소설의 제목은 '작별하지 않는다'였을까. 소설을 거듭해 읽으면서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애도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4. 3. 사건이 일어나고 정말 많은 시간이 지나갔지만, 이제 그 사건은 어느덧 역사가 되어 때가 되면 추념하는 옛일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애도를 멈출 수는 없다. 우리는 몸에 상처를 입으면 흔히 약을 발라 새살을 돋운다. 딱지가 떨어지고 나면 나았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은 없어지지 않는다. 4. 3. 사건 또한 그렇다.


우리는 한때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다. 그 사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 사실을 아무리 공들여 애도하고 추념해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으며, 오랫동안, 어쩌면 지금까지도 계속 아파하고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충분히 애도할 시간과 여유가 필요하다. 어쩌면 영원히 그래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실을 함부로 부정해서는 안 된다. 상실은 누구에게나 뼈아프기 때문이다. 다른 글에도 썼지만, 우리는 언젠가 한 번 이상씩은 무언가를 잃어버려본 경험이 있으며, 그 경험으로 아파본 적이 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 상실은 누구에게나 아프게 다가온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충분한 애도가 필요하다. 울 수 있는 데까지 울고, 아플 수 있는 데까지 마음껏 아파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의 시간을, 무참한 현실을 어떻게든 견딜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작별인사를 한다. 떠나보낸 것들, 잃어버린 것들에게. 작별인사와 작별하지 않는다. 우리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어떤 것들, 누군가들을 떠나보내고 잃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지나간 시간들, 희미해지는 기억들에 안녕을 고한다. 안녕, 잘 가, 수고했어, 고마웠어. 그래야 우리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것들을 개운하고 가뿐한 마음으로 맞을 수도 있다. 안녕, 반가워,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이제 마무리하려는 이 글 또한 애도하는 마음으로 기껍게 떠나보낸다. 앞으로 새로운, 더 나은 글을 맞이하기 위해. 안녕,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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