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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 Oct 10. 2024

차를 우리는 시간

찻잔에 새겨지는 찻물의 흔적들을 따라서

삶에 염증을 자주 느끼곤 한다. 그리고 실제 신체적으로도 염증이 잘 난다. (농담 같지만 진짜다) 내면에도, 몸 안에도 열이 많은가보다 생각한다. 술도 잘 못 마신다. 조금이라도 마시면 얼굴이며 온몸에 발긋발긋 발진이 일어난다. 그나마 커피가 한동안 큰 위안이자 작은 일탈이 되어주었다. 최근 2년 정도는 핸드드립 커피에 푹 빠져 있었다. 처음에는 핸드드립을 잘 하는 수도권 내 온갖 카페들을 돌아다녔고, 나중에는 집에서 직접 핸드드립을 해보기 시작했다. 1년에 서너 번 있는 커피와 차 박람회를 꼬박꼬박 다니며 온갖 종류의 드립 도구들과 원두들을 사모았다. 난 역시 덕후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작년 연말부터 올 봄까지 정말 크게 앓았다. 처음에는 위염 증세가 조금 있었는데, 정도가 점점 심해졌다. 매일 약국에서 위 보호제를 사먹다 지쳐서 병원에 가 위내시경 검사를 받고 위염 약을 장복했다. 그래도 쉽게 낫질 않았다. 대학병원에 가 복부초음파 검사를 받았다. 담낭에 이상이 있단다. 커피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커피는 줄이거나 끊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섰다. 디카페인 원두를 조금 사서 먹다가, 이내 원두를 그만 사게 되었다. 아무래도 카페인 원두보다 디카페인 원두는 맛이 떨어진다.


술도 담배도 마약도 못하는데 커피까지 끊으라고요? 의사에게 따져봐도 의사는 잘못이 없다. 타고나길 소화기가 약한 내 탓이고, 건강 관리를 소홀히 한 내 탓이지. 따뜻한 봄날을 온통 우울하게 보냈다. 그러다 우연히 간 국제차문화대전에서, 대전이 소재지라는 다원의 여직원 분을 만났다. 나보다 한참은 어린 것 같은 그 직원 분이 가만가만한 몸짓으로 개완에 찻잎을 덜어 천천히 우려주셨다. 보이차의 한 종류라고 했다. 사실 전부터 백차는 즐겨 마셨는데 슬슬 물리던 참이어서, 보이차로 넘어갈까 생각하던 차였다. 반가움에 향부터 맡았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박람회장이 한순간에 고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꼭 시간과 공간이 멎어버린 것 같았다.


과일의 운치와 꽃의 향을 가졌다는 차는 산지도 명기되어 있지 않았다. 보통 커피도 차도, 이름이 지어질 때 그것이 난 산지가 명기된다. 그래서 소비자들은 그들의 취향에 맞는 산지의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차는 워낙 소량 생산되는 데다가, 생산자가 산지를 밝히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했다. 중국 어느 지역 깊은 산에서 비밀스럽게 자라는 찻잎들. 여직원은 소리없이 웃으며 이제 점점 진한 맛을 좋아하시게 될 거예요, 라고 말했다.


그날 이후 열몇 종의 중국차 샘플을 샀다. 말린 꽃으로 만든 꽃차도 여러 종류 샀다. 이천에 작업실을 두었다는 도예가로부터 개완과 찻잔들을 샀다. 매일같이 차를 우렸다. 손에 꼭 맞는 개완을 쥐면 기분이 좋아졌다. 여직원만큼 세련되고 꼼꼼한 몸짓은 아니었지만, 천천히 찻물을 따르는 법을 익혔다. 집 밖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심리적으로) 신나게 얻어터진 날, 집에 와서 가만히 차를 우리면 나를 둘러싼 모든 유독한 것들이 서서히 녹아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어떤 친구에게도 말한 적이 있는데 나는 어쩌면 맛있는 차를 마시는 것보다, 따뜻한 물에 찻잎이 천천히 우러나는 걸 보는 게, 또는 차를 우리는 나의 느린 몸짓이 더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여직원이 내게 차를 우려준 순간 소란스러웠던 사방이 일순 고요해진 것처럼, 나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이 어떤 의미도 담지 않게 되는 게 좋은지도. 그때만큼은 혼자여도 온전히 넉넉하고, 낯선 이와 함께여도 따뜻하고 다정한 느낌이 든다. 그게 차 한잔이, 또는 자그만 찻자리가 갖는 힘인가보다.  


그게 좋아서 요새는 이런저런 꽃잎과 찻잎들을 섞어 나만의 블렌드티를 만들고, 그것을 주변에 나누어주기를 즐긴다. 좋아하는 지인들도 있고, 신기해 하는 지인들도 있고, 아주 가끔은 뭘 그렇게 퍼주냐고 딱해 하는 지인들도 있다. 그러나 꽃잎도 찻잎도 모두 묵으면 맛도 신선도도 떨어지는 법, 그럴 바에는 주변에 나누어주고 함께 먹는 게 낫다. 다양한 꽃잎과 찻잎들로부터 내가 느낀 넉넉함과 다정함을, 내 주변 사람들도 함께 느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나는 덕후가 맞고, 모든 덕후는 홍익인간적인 부분이 있다.  


요즘 가장 좋아하는 블렌드티는 잘 마른 장미꽃송이나 국화꽃잎 약간에 이슬찻잎을 섞은 것. 장미나 국화는 향이 좋고 맛은 은은한 편인데, 이슬찻잎은 달콤해서 궁합이 꽤 좋다. 국화꽃잎도 감국과 소국이 서로 크기나 향이 미묘하게 달라서, 함께 섞으면 가을밤에 어울리는 블렌드티가 된다. 커피 원두들의 조합도 무궁무진하듯, 꽃잎과 찻잎의 조합도 무궁무진하므로, 덕후의 블렌딩 탐구는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될 것 같다. 이렇게 내 안에서 또 한 세계가 넓어진다.


커피잔에도 커피물이 들듯, 찻잔과 개완도 오래 쓰다보면 자연스레 찻물이 든다. 어떤 사람들은 지저분해 보인다고도 하는데, 나는 그마저도 좋다. 질 좋은 가죽으로 만든 소품이 손때가 묻어 빈티지함이 살아나듯, 찻물 드는 다기들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신만의 멋이 생긴다. 언젠가부터, 나도 찻물 드는 찻잔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삶의 많은 곡절들이 주는 흔적을 내 방식대로 받아들이며 천천히 시간 속에 녹아들고 싶다고. 그래서 오늘도 찻물을 천천히 우리며, 하룻동안 겪은 무수한 슬픔과 아픔을 서서히 녹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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