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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 Jun 21. 2023

그 멜로디를 기억해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

얼마 전 류이치 사카모토가 세상을 떠났다. 나는 학창시절의 기억이 칼로 도려낸 것처럼 거의 없지만, 그때부터 들었던 음악들은 지금까지 나의 음악 취향을 유지하는 데 정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당시부터 비교적 최근까지, 나는 FM라디오를 정말 즐겨 들었다. '유희열의 음악도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나의 라디오 인생은, 여러 DJ를 거친 '별이 빛나는 밤에', 그리고 '배철수의 음악캠프', 결국 KBS 클래식FM의 '노래의 날개 위에'에까지 가 닿았다. (이외에도 정말 많은 라디오 프로그램들을 들었지만 여기에 일일이 언급하기가 어렵다...)


그러다보니 음악 취향이 정말 잡다해졌다. 사실 지금도 스트리밍 서비스의 개인 폴더를 뒤져보면 참 여러 가지 음악이 담겨 있다. 이은하의 '봄비'부터 백예린의 '다시 난, 여기'까지, 조용필의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부터 몬스타엑스의 '무단침입'까지. 어쨌든 류이치 사카모토는, 이런 나의 잡다한 음악 취향 중 가장 커다란 기준점이 된 음악가였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건 역시 가수이자 작곡가, 프로듀서인 윤상 때문이다. 윤상에게 류이치 사카모토는 전범이자 스승이다. 윤상은 어려서부터 내가 가장 즐겨 듣던 가수였다. 그의 지적인 목소리와 쓸쓸한 가사가, 다채로운 사운드가 좋았다.


윤상이 좋아서 그의 모든 음악에 빠졌고, 그가 영향을 받았다 하는 음악가들도 열심히 찾아 들었다. 제3세계 음악이라고 하는, 그러니까 아시아와 영미권, 유럽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의 음악을 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가 군대에 다녀온 후 낸 <Renacimiento> 와 <Insensible>은, 제3세계 음악을 경험하면서 느끼고 이해한 것들을 그의 방식대로 담아낸 앨범들이다. 특히 <Insensible>에 담긴 라틴의 리듬과 일렉사운드의 조화는, 그가 크게 영향 받은 아스토르 피아졸라와 류이치 사카모토를 그의 개성으로 녹여낸 듯하다. 그래서 그 앨범이 발매된 무렵부터 류이치 사카모토를 열심히 파 보기 시작했다. 중학생 때다.


당시 PC통신과 인터넷이 대중적으로 보급되면서 그나마 해외 음악가들에 대한 정보를 찾아볼 수 있었다. 내 이전 세대들은 불법 복제한 LP나 테이프를 구하기 위해 청계천을 돌아다녔다는데, 나는 몇 안 되는 인터넷사이트와 PC통신방을 돌아다니며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을 찾아다녔다. 그때 산 테이프가 <Sweet Revenge>와 <Back To The Basic>이다. 그는 우리나라에 흔히 뉴에이지 음악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건 당시 <Back To The Basic> 음반이 인기를 끌면서 그 앨범의 몇몇 곡이 광고에 배경음악으로 삽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저변이 무척 넓은 아티스트다. 사실 그의 본류는 전자음악이라 할 수 있지만(그는 젊은 시절 Yellow Magic Ochestra라는 일렉트릭사운드 기반 그룹의 멤버였다), 거기서 그치지도 않았다.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마지막 황제> 등 많은 영화의 음악감독이기도 했고, 2000년대 이후에는 라틴음악에 경도되어 모렐렌바움 부부와 <CASA>라는,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음악을 재해석한 음반을 내놓기도 했다. 그 후로도 많은, 다양한 사운드에 주의를 기울이며 실험적인 음반들을 내놓았다. 그런 그의 기반에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가 있었다. 내게 가장 소중한 고전음악가가 바흐가 된 것은, 아무래도 류이치 사카모토 때문이다. 그의 음악이 바흐를 전범으로 한다는 것을 알고, 클래식FM을 들으며 바흐의 음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사춘기 무렵이다. 그러다 우연히 (19금인데) 영화 <양들의 침묵>을 보았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 중 한곡을 들었다. 음악의 아버지라는 구태의연한 수식어가 왜 붙었는지 알 것 같았다. 만약 신이 있어서 그가 신들만 듣는 음악을 만들 줄 안다면, 그 음악이 저런 느낌일 것 같았다.


나는 다른 글에 내가 덕후의 기질을 타고났다고 썼는데, 정말 그렇다. 음악에서도 이 덕심이 발현되면 정말 정신없이 빠져든다. 요즘도 그렇다. 마음이 들쭉날쭉해질 때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 앨범이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찾아 듣는다. 그의 음악에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세대와 국가를 초월하여 일관되게 전달되는 굉장한 메시지가 있다. 기쁨도 슬픔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 그러므로 묵묵히 나아가라는 것, 그게 어떤 길이든 간에. 그래서 기쁠 때 그의 음악을 들으면 그 기쁨에 들뜨지 않게 되고, 슬플 때 그의 음악을 들으면 그 슬픔에 매몰되지 않는다. 나는 그의 음악을 약 삼아 듣는다. 바흐의 음악에는 그런 힘이 있다. 사람을 끝까지 견디게 하는 위대한 힘이.


앞으로도 나의 음악 취향은 그렇게 쭉 잡다할 예정이다. 요즘은 달리기에 빠져있다 보니 아이돌그룹의 댄스음악에 몰두해 있다. 최근에 나의 빠른 달리기에 도움을 막대하게 준 친구들은 BTS와 세븐틴, 그리고 몬스타엑스. 그 외에도 투모로우바이투게더, 스트레이키즈, 가장 최근에 즐겨 듣게 된 피프티피프티도 정말 좋다. 아이브와 뉴진스는 말할 것도 없다. 엔믹스와 카드는 거의 모든 노래가 다 좋다. 동생이 추천해준 제인팝이나 세븐어스도, 재미있게 듣고 있다. 하지만 달리기 음악이라고 너무 빠르기만 해서는 곤란하다. 쉽게 지치기 때문이다. 요새는 느린 음악을 들으면서도 달리기를 한다. 잔나비, 에피톤프로젝트, 윤하, 강아솔, 그 중에서도 스텔라장은 최근에 사귄 가장 좋은 음악친구다.


요즘 들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그렇게 잡다한 플레이리스트가 담긴 핸드폰으로 음악을 재생하고, 귀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고,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길을 달리는 시간이다. 초여름이 되면서 비가 잦고 습도도 높아지고 날이 무척 더워져, 이런 시간을 누리기가 많이 어렵다. 그래도 비 오는 날 달리기가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알게 되어 참 다행이다. 낡아진(세탁해야 하는) 러닝화를 신고, 온몸에 촉촉 내리는 비를 맞으며 달리는 기분이 얼마나 상쾌한지 모른다. 그래서 다가오는 장마철이 그리 두렵지가 않다. 어쩌면 오래 이어질 눅눅하고 꿉꿉하고 텁텁한 시간들도, 나의 산뜻하고 다정한 플레이스트와 함께 잘 이겨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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