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간다는 마음으로
나는 종이를 무척 좋아한다. 내가 건축을 한 이유도 종이 위에서 하루 종일 뭔가를 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지금은 컴퓨터로 도면을 그리지만 예전에는 제도대위에서 종이에 하루 종일 그려 댔어야 했다.)
비싼 노트를 사면 오른손으로 예쁘게 정성스럽게 글씨를 써 내려가다가 반도 쓰이지 않은 채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책꽂이에 영락없이 꽂히게 된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써야지 맘 먹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예쁘고 세련된 노트가 내 맘을 빼앗아 버린다. 요즘에는 컴퓨터로 글을 쓰니 종이가 필요치 않은데도 나의 노트북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다.
쓰다 만 노트를 열어보니 빡빡한 글씨들이 빼곡히 박혀 무슨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지 내용을 다 읽어야 겨우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독일 학생들은 노트정리를 하지 않고 포스트잇 같은데 중요한 단어로 메모만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시험 기간이 되면 그 메모장의 단어를 중심으로 시험 준비를 하니 마냥 외우는 것보다 좀 더 체계적인 공부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유튜브에서 자신이 많이 사용하지 않은 손을 활용하면 두뇌의 활동이 왕성해진다는 걸 알았다.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글을 쓰면 창의력, 직관력, 공간인식을 담당하는 뇌의 우반구가 자극된다는 것이다. 오십이 넘어 내리막길 마냥 모든 기능이 퇴화되는 이 시점에 인지 능력, 문제 해결 능력, 심지어 향상된 기억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니... 간단히 쓰면서 두뇌 운동을 한번 시켜볼까?
노트 뒤편 하얀 종이를 가져다 왼손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요즘에 내가 관심 있는 눈썹을 그리는 방법에 대한 유튜브를 보고 왼손으로 노트 정리를 하였다.
삐뚤삐뚤 글씨가 예쁘게 쓰이진 않았지만 글씨가 큼직큼직해서 요점이 오히려 더 잘 파악할 수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써 내려가면, 글씨를 예쁘게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남은 종이 메우는데도 No Problem!!
연세가 있음에도 피부가 좋은 분들을 보면 젊었을 때부터 피부에 대한 관심이 가지고 일찍 관리를 시작하신 분들이 많다. 치매 예방도 일찍부터 좋은 생활습관을 들여야 한다. 오늘의 작은 실천이 훗날 나의 정신줄을 잡아주는 좋은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어쨌든 오늘을 오랫동안 내가 안고 있던 문제를 해결하는 운 좋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