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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마디에 숨어 있는 나의 상처들

존중을 말하는 나, 그 말 뒤에 숨어 있던 이야기

by 해피엔딩

저는 가끔 제가 자주 쓰는 단어를 떠올려 봅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존중’, ‘배려’ 같은 말이 자주 입에 맴돌아요.
그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왜 나는 이 단어들을 이렇게 자주 말할까?”

어쩌면 그 말들 속엔 제가 오래전에 품고 있던 상처의 결이 함께 새겨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제 마음을 훅 꿰뚫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습니다.
인생의 갈림길 앞에서 내뱉어진, 굳이 하지 않았어도 될 말.
그 말은 오랫동안 제 안에서 ‘존중’이라는 단어를 필요 이상으로 크게 만드는 씨앗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얼어붙는 마음을 알아챈 후에야 보였던 것들

어른이 되었어도, 누군가의 무례한 말 앞에서 저는 손발이 얼어붙습니다.
입술이 마르고, 머릿속이 하얘지고,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그 순간.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Freeze 반응이라고 부른다지요.

싸우지도 못하고, 피하지도 못하고, 그저 멈춰버리는 반응.
저는 오래도록 그런 제 반응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알게 되었습니다.

“멈춰버리는 내가 틀린 게 아니라, 나에게 그런 순간을 버텨낸 세월이 있었던 것”이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네 번째 반응’을 연습합니다.

상대를 판단하지 않고

그 상황을 관찰하고

내 감정과 욕구를 읽고

필요하다면 차분하게 말하는 것

입 밖으로 꺼내기까지는 시간이 걸리지만,
한 걸음씩 연습하고 있습니다.
저의 얼음을 녹이기 위한 작은 노력들입니다.


아내의 한마디가 내 마음을 멈추게 한 이유

그날 아내가 말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당신을 존중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
“그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세계를 보여줄 뿐, 당신 가치를 말하는 게 아니야.”

그 말이 제 마음에 조용히 내려앉았습니다.
그동안 누군가의 말이 내게 던진 파동을
모두 ‘내 책임’처럼 떠안고 살았던 제 오래된 습관이 보였습니다.

아내는 이미 ‘감정과 욕구를 분리하는 법’을 꽤 익숙하게 해내고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내가 불편했던 것은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을 내 문제로 착각하는 오래된 패턴이었다는 것을요.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이 아직은 두려운 사람

사실 저는 제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는 것이 불편합니다.
무슨 일이든 내가 직접 쥐고 있어야 안전한 느낌이 드는 사람입니다.
아내와 다르게 저는 아직 누군가 앞에서 쉽게 속내를 펼칠 만큼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아마…
언젠가 제가 너무 쉽게 마음을 열었다가 상처받았던 순간들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요즘은 조금씩 저 자신에게 말합니다.

“괜찮아. 아직 준비되지 않은 건, 그냥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뿐이야.”

저는 지금 그 길을 지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결을 다듬고 있는 중입니다.


관계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

아내와의 대화는 늘 저를 성찰하게 만듭니다.
우리 둘 다 서로에게 ‘해결책’을 던지기보다,
조심스레 마음의 온도를 읽습니다.
어떤 말 뒤에 숨어 있던 감정,
그 감정 뒤에 있던 욕구,
그리고 그 욕구가 생겨난 배경까지.

가만히 보면
우리의 모든 불편함은 결국
사랑받고 싶어서,
존중받고 싶어서,
인정하고 인정받고 싶어서 시작되는 작은 신호들입니다.

그 신호를 듣는 법을 배우는 중이고,
때로는 서로의 속도로 기다려 주는 중입니다.


상처는 때로 언어의 형태로 다시 돌아온다

우리가 자주 쓰는 말은
때로 상처가 지나간 자리에서 싹이 난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싹은 결국
우리가 어디에서 넘어졌고
어떤 곳에서 외로웠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말들 덕분에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조금 더 천천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아내와 나의 대화는 그래서 늘 한 편의 작은 성장기 같습니다.

오늘도 그렇게,
한 문장씩, 한 감정씩
우리는 서로를 더 잘 이해하는 길 위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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