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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간 Oct 20. 2023

졸고(拙稿)

나무인간 65

나는 주저앉는다. 몇 해 전부터 약을 챙겨 먹어 가슴 조임과 답답함은 나아졌지만, 그래도 급히 변하는 날씨 탓인지 여전히, 호흡이 가쁘다. 나는 안다. 다시 긴 밤이라는 걸. 이맘때면 복용하는 약도 소용없다. 그러면 나는 작년에 버린 민트색 소파를 상상하며 가만히 눕는다.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성우의 글을 쓴 것 그리고 트리거에 대한 단상을 꽤 복잡하게 적었던 것인데, 여름이 지날 때까지도 끝내 정리하지 못했다. 그것은 어리석음이 만든 직관과 관념 덩어리였다. 이렇게 또 마음에 졸고 이면지가 쌓인다. 단상을 쓰면 쓸수록 스스로 한심했다. 글 속에 나는 중독을 핑계 삼아 방아쇠 당겨줄 타자를 찾는 얼간이었다.


 3월에 한성우 작가를 다시 만나 대화를 나누고, 4월에 원고 청탁을 받고, 6월에 지산이형 스튜디오에서 그에게 술을 권하고 8, 9월엔 난지창작스튜디오로 찾아가 몇 번 더 그와 술을 마셨다. 나는 술을 끊은 화가에게 다시 권한 놈이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남의 글을 훔치고 빌어 겨우 탈고했다. 아니 졸고를 넘겼다. 그렇지만 저번 어느 도예가의 글보다 훨씬 흡족하다. 이후 세 번을 더 고쳐 난지 측에 보냈는데 그쪽에서 보면 분명 나는 마감 진상이다. 그럼에도 계속 후회하며 텍스트를 고칠 것 같아 지난 일요일 보낸 메일을 끝으로 다시 글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다. 이상할 만큼 미련이 남지 않는다. 잘 쓰고 싶다는 욕심만 중얼거리다 끝난 부끄러움 따위를 기관에 송고하고도. 나는 뻔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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