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에포케: 세속화된 언어의 멈춤
‘응시’의 공감각적 활용
문학창작에서 감각의 활용은 무척 중요하다. 특히, 하나의 감각에 치우치지 않고 작가에게 허락된 오감을 적극적으로 펼쳐내는 것은, 그의 재능만큼이나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괄호가 쳐진 대상은, 내부에서 치솟는 ‘발산하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분출하는데, 이때 대상을 순간적으로 또는 지속적으로 포착하는 것은 오로지 작가의 몫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순간성’이란 대상의 찰나적 변화에 기댐으로써 대상의 미세하고도 정교한 상태변화를 파악하는 것이고, ‘지속성’은 오래 머물러 깃듦으로써 대상의 전체를 파악하는 것. 이를테면, “당신의 몸에 바람이 파고든 흔적이 있다 // 그 흔적의 깊이와 완력은 당신 속으로 내려앉았던 돌 하나의 무게, 잔설이 멈춘 순간이다”(박성현, 「세한도, 봄꿈」)의 경우 첫 문장의 ‘지속성’과 둘째 문장의 ‘순간성’이 한 작품에서 뚜렷이 대칭되고 있다.
갑자기 대상의 순간성과 지속성을 얘기하는 게 어리둥절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다. 경험한 사람은 알겠지만, 괄호가 쳐진 대상은 모든 맥락으로부터 일탈하며 시원의 아담처럼 발가벗겨진다. 그러나 그 상태가 바로 시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맥락이 끊기는 순간에도, 또 다른 맥락이 급격하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 주체는 누구일까? 당연히 창작자다. 그의 감각이고, 기분과 감정이며 사유다.
괄호 속의 대상은, 마치 빅뱅을 목전에 둔 우주의 씨앗과 같다. 그것은 끓어오르고 삼켜버리고 있다. 어쩌면 자기 자신까지 먹어 치울 기세다. 괄호에서 벗어나기 위해, 맥락을 갖기 위해서 말이다. 이때 시인은 잠시 신의 자격이 주어지며, 그의 돌발적 개입으로 대상은 가시적 영역으로 치솟는다. 아주 느릴 수도, 혹은 정신 못 차릴 속도일 수도 있다. 물론 전자는 지속성으로, 후자는 순간성으로 수렴된다. 특히 시에서는 시인의 언어와 감각, 대상 간의 거리가 다른 장르보다 촘촘하므로 어느 정도는 동체의 단련된 근육이 요구된다.
그러나 순간 방사되는 그 빛을 동체만으로 파악하기는 요원하다. 이때 필요한 것이 감각들의 총체적 작용, 곧 ‘직관’이다. 따라서 시각은 반드시 청각을 수반해야 하며 청각은 촉각과 미각, 후각까지도 장착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응시’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는데, 대상을 오래도록 바라보기, 끓어오르는 감정이나 일말의 여지를 두지 않고, 아무런 희망도 없이 거리를 둔 채 깊이 바라보기…… 정도가 단어에 내포된 속뜻이겠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면 ‘응시’는 무용지물이 된다. 따라서 응시는 청각과 촉각으로 건너가야 한다. “밥상 너머 당신이 걸려 있었네 심장을 꿰매는 소리가 서걱서걱했네 나를 부르는 단호한 소리였네”(박성현, 「속초」)라는 문장처럼 말이다. 뿐만 아니다. 이미 우리는 일상에서 공감각적인 단어나 문장을 쓰고 있다. “저기 하루살이 끓는 소리 좀 들어봐!”라는 문장이나, “벚꽃이 팝콘처럼 톡톡 터진다”, 혹은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TV 광고) 등이 그것이다. (*)
Q.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