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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현 Jan 19. 2024

에포케, 창조적 멈춤

제2장 에포케: 세속화된 언어의 멈춤

에포케, 창조적 멈춤



내 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그것’에 괄호를 친다는 것은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겠다는 창작자의 의지와 다름없다. ‘모든 인식은 무엇에 대한 인식이다’라는 현상학적 환원을 소환하지 않더라도 ‘대상’의 맥락을 소거하기 위한 에포케epoche, 곧 ‘대상에 괄호 치기’9)는 뜻밖의 놀라운 효과를 가져온다.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시의 대상이 정해지면 그 대상을 ‘( )’ 속에 넣는다. 정확히는 실체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대상을 가리키는 언어다. 가둔다는 표현도 적당하겠다. 


(2) 괄호의 모양을 통해 유추할 수 있듯, 대상에 관습적으로 따라붙는 ‘맥락’(혹은 ‘사용’)을 일단 대상에서 제거한다. 그러다 보면 모든 관습적 의미로부터 벗어난 날것으로서의 ‘그것(iT)’이 서서히 떠오르게 된다. 혹은 내용이 없는 순수한 형식만 갖춘 ‘그것’이 보일 것이다. 


(3) ‘그것’은 태어나 아직 울음을 울지 않은 태아다. 무한의 가능성을 가졌고, 문명화(혹은 이름) 이전의 순수다. 김종삼 시인이 노래한 “내용 없는 아름다움”(「북치는 소년」)10)이다. 


(4) 이제 창작자는 잠시 신이 된다. 이름을 붙이고, 쓸모(혹은 ‘사용’)를 부여하며, 시로 고양시킨다.    

 


                                                            *     



모든 생각, 느낌과 감정은 그 대상으로부터 나온다. 사물은 사물들끼리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인간의 손과도 연결된다. 나는 이 ‘손’으로 또 다른 사물에 접속하고 범위를 확장해가며 내 감각과 사유를 면밀하게 다듬는다. 사물이란 오로지 그 ‘연결’ 속에서만 사물이 된다. 육중한 강철로 주조된 망치는 목수의 손에서 못을 박는 도구가 되며, 살인자의 손에서는 범행의 도구가 된다. 


내게 종종 찾아오는 ‘11월의 우울’은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가을이 완전히 물러가기 전의 쓸쓸한 정취에서 시작하고, 홀로 겨울을 견뎌야 할 그 외로움에서 절정을 이룬다. ‘11월의 우울’이란 서릿발처럼 차가운 가을비와 아피리를 모조리 털어버린 나무의 가냘픈 선(線), 그리고 안개처럼 끈적끈적하고 미지근한 입김과의 연결이 아닐까. 유월의 산뜻함도 마찬가지. 그때 유월은 높은 태양과 뜨거운 구름, 펌을 한 듯 풍성한 숲으로 가득하다. 


나는 항상 무한의 연결 한 가운데 있다. ‘나’는 무한의 까마득한 너머로 사라지는, 언제든지 소실될 수 있는 하나의 점으로써 말이다. 세계는 바로 그 장소(혹은 좌표)들의 총체다. 그 속에서 모호하고 감춰진 것은 없다. 자세히 보고 오래 들으면 열리기 마련이다. ‘연속’의 생생한 현재들, 다시 말해 사물과 사물, 사물과 인간, 사물과 세계의 이어짐이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를 통해서만 우리는 현존한다. 문학으로 눈을 돌려보자. 작품이란 다름 아닌 언어로서 우리에게 열리는 무엇이다. 


그런데 만일그 대상에 괄호를 친다면 어떨까이 연속을타자에게 감응하는 속도를 제로로 만들어버린다면오로지 사물 그 자체로서 그것만이 전부인 채로 열어 둔다면? 아마 면도를 하면서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문득 ‘저 사람이 내가 맞나?’하는 묘한 기분이 들 것이다. 거울에 갇힌 ‘엘리스’ 혹은 쳬서고양이의 이상하고 황홀한 웃음: 때문에 우리가 대상에 괄호를 칠 때는 다음 두 가지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첫째, 대상을 둘러싼 모든 맥락들을 끊어버리고 오로지 ‘나’와의 마주함을 통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 둘째, 그때 파생되는 수많은 이미지들을 놓지지 말고 기록한다. 


방법은 이렇다. 내 손에 ‘약’이 있다고 치자. 지름이 0.5mm 정도의 동그랗고 새하얀 약은 그 맥락상 의사와 내 식도를 연결한다. 만일 그 에 괄호를 치고 맥락을 끊어버리면 그 이미지-형식만 남게 된다그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낙수에 노출된 좁쌀만 한 묵은눈 덩어리’나 공포를 유발하는 ‘환’(環)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묵은눈에 쌓인 당신의 동공을 본다. 나는, 그 환(環)을 한움큼 집어 입에 털었다”라는 문장이 가능해진다. 시적 대상을 유년으로 정했어도 마찬가지다. 가급적 그 시절을 가감없이 떠올리자. 포근한 다락방으로 올려보내는 것은 그다음 문제다.      



짙은 회색 소나기가 떨어지다가 공중에 멈췄다 물방울을 뜯어내면 못 자국이 생겼다 구멍과 얼룩이, 보풀처럼 일어나 번지는 것인데 뒤집어지고 스며들며 멀리 간 것까지 불렀다 시청 계단에 앉아 립스틱을 바르던 애인이, 내 입술에 묻은 빨강을 보고 웃어댔다 어리석은 취향이야 

─ 박성현, 「물방울을 뜯어내면」 부분     



이 시는 소나기를 피해 어느 아케이드 지붕에서 잠시 쉬는 ‘나’와 ‘애인’을 그린 작품이다. 이미지의 핵은 물방울 뜯어내기. 이야기의 전모는 이렇다. 짙은 소나기가 내리는 한여름, 나는 비를 피해 어느 아케이드 지붕 밑에 서 있다. 스콜이라 불러도 이상할 것 없는 ‘비’다. 공중을 수직으로 긋는 페인팅 나이프를 따라 비가 흐른다. 나는, 저 사물의 단호함을 지켜본다. 좀처럼 끝나지 않는 비, 한참을 보다가 문득 물방울을 뜯어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손을 내밀어 비를 멈추고, 손톱을 살짝 긁으니 물방울이 뜯기면서 그 자리에 못자국이 생겼다. 나는 계속 물방울을 뜯어냈다. 구멍과 얼룩이 보풀처럼 일어나 번지는데 애인은 내 립스틱 색깔이 지나치게 빨갛다고 놀린다. 뒤의 내용은 생략하고. 물방울을 뜯어낸 자리에 못 자국이 생기고 도미노처럼 번져간다.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다.      


                                                            *     


정리하자. 무엇을 쓸지 대상이 정해지면, 당신은 그 대상을 둘러싼 맥락을 하나둘 제거하면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도록 노력하자. 맥락을 제거하면 대상만 남게 되고, 그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은 ‘나’의 상상력을 증폭시키면서 극대화된다.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아이디어가 생성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만, 그 한계가 어디에 있느냐가 문제일 것인데, 나는 만족하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만족하는 순간에 괄호 치기는 끝난다. 가령, 사과를 반으로 쪼개면 흰나비가 날아오른다는 발상은 여기서 나왔겠지만, 이것도 지워야 할 맥락 가운데 하나다. “흰나비 날개를 뜯어내자 새빨간 사과즙이 뚝뚝 떨어졌다”는 문장까지 가야 한다. 물론 이것도 지워야 한다. (*)




(9) 에포케는 ‘정지’, ‘중지’, ‘보류’라는 뜻이며, 이를 소환한 현상학에서는 어떤 사태나 사물에 대한 판단을 보류(혹은 중지)하여 선입견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10) 김종삼, 『김종삼 전집』, 청하, 1988, 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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