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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현 Feb 02. 2024

낮술을 마시고

제2장 에포케: 세속화된 언어의 멈춤

[시 창작 에피소드 #2]     


낮술을 마시고



내게 술에 관한 작품은, 이상하게도 귀신과 얽혀 있다. 낮술을 마신 사촌들의 손을 잡고 낯선 곳으로 향했던, 짧고 선명하고 원근이 분명한 풍경. 하지만 기억할수록 맥락이 끊겨버린 채 일정 구간만 반복하는 일종의 타임-루프에 갇혀버린 유년의 풍경:


가늘고 두꺼운 흰 띠를 둘렀지만 대체로 붉은색이다 장미를 찔러 넣으면 가시가 돋을 것 같았다 사촌들은 머리와 사지가 없는 이 덩어리를 벽에 걸어야 하는데 대못이 없다고 투덜댄다 꽃다발을 뒤집어 말리는 것이 향기를 오래 잡아두는 것이라 했다 낮술을 잔뜩 마시고 철공소 쪽으로 걸어갔다 앞으로 뻗은 바탕을 발굽으로 꾹꾹 눌렀다 누른 자국마다 붉은 가시가 부풀었다 나는 내 덩어리가 대못에 박히는 악몽에 대해 오래도록 물었다 오늘이라 생각한 날은 이미 지나가고 없었다 사촌들도 이미 죽거나 사라졌다

─ 박성현, 「철공소」 전문     


이 시는 내용은 무척 단순하다. 이 낮술을 마신 사촌들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하나의 시퀀스 속에 몇 개의 구체적인 사건이 등장하는데 이상하게도 시는 안개 속에 들어간 듯 모호하다. 시가 모호해진 이유는 ‘나’의 존재 때문이다. 나는 마지막에 “내 덩어리가 대못에 박히는 악몽”을 꾸는데, 묘하게도 ‘나’는 진창을 걸을 때 굽이 찍혔던 것이다.


사촌들은 낮술을 마시고 얼굴이 불콰해진 채 철공소를 지나갔다. 나는 어려서 사촌들의 손에 매달려 철공소 앞 물웅덩이를 건넜다. 우기가 지나갔지만 끈적끈적한 이 대기는 도무지 적응하기 어렵다고 사촌들이 말했다. 햇빛이 강렬할수록 땅에 스며든 습기는 무겁게 휘발했다. 낮술을 마시면서 사촌들은 ‘없는 몸’에 대해 투덜거렸다─그들 중 몇몇은 푸줏간에서 일한다. 이마에 여드름이 잔뜩 돋아 대체로 붉은 낯빛인 사촌들은 철공소의 철망을 타고 올라가는 장미넝쿨을 보고선 녹이 슬어 부푼 쇠뭉치 같다고 말했다. 어렸지만 나는 고상한 척하며, 몇 번 본적도 없는 장미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때 사촌 한 명이 머리와 사지가 없는 덩어리를 벽에 걸어야 하는데 대못이 없다고 말했다.


사촌들은 낮술을 마시고 철공소를 지나갔다. 장마가 지났어도 땅은 진창이었다. 걸을 때마다 발굽이 찍혔다. 어쩌면 돼지가 수컥수컥 땅을 파헤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밤에, 나는 머리와 사지가 잘려나간 내 덩어리를 대못에 걸어 놓는 악몽을 꾸었다. 악몽은 ‘나’를 공백으로 만들어놓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언어를 열어버린다. 마치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도 살아 있다는 듯.


이것이 내 기억에 머물러 있는 가족의 원초적 풍경 중의 하나다. 나는 친구에게 얘기하듯, 아무런 장식이나 수사를 배제한 채 무덤덤하게 썼는데, 이상하게도 내 유년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 언어는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고 싶다는 듯 기억을 던지면서. 이후 '사물의 영역'이라는 부재를 연작의 개념으로 달고, 유년과 관련된 시를 적지 않게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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