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의 시창작 노트 part.3_ 제2장 환상-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꾼다1)
1. 여기 하나의 목소리가 있다. 그것은 순전히 작품 내부에서 발화되어, 작품의 의미를 끊임없이 절연하고 이어붙이며 지속하고 확대한다. 문학이 존재하는 한, 그것은 언어-안-에서 ‘언어’를 폭발시킨다. 오로지 꿈을 꾸는 ‘목소리’가 있을 뿐이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2. 시는 일상 언어의 특수한 분절이다. 소리는 언어로 분절되고, 다시 언어는 ‘시’로 분절되면서 독특한 미학적 체계로 완성된다. 그리고 이 ‘분절’의 주체는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 문학이 탄생한 이래 변하지 않은 혹은 변하지 않기를 ‘고집’하는 규범이다. 오로지 인간에 의해, 인간만의 깊고 무한한 통찰에 의해 언어는 빛의 중심에 서고, 바로 그곳에서 시는 태어난다는 것이다.
3.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믿기를 강요받는 글쓰기의 ‘신화’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어’라는 거대한 상징체계에 종속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사용 주체라는 확신은 기묘한 환상이며, 인간은 언어-안-에 포획된, (이렇게 부를 수 있다면) ‘언어의 감옥’에 수용된 타자일 뿐이다. ‘나’에 대한 모든 이해는 언어로부터 시작하고, 언어를 통해서만 증명할 수 있다. 모국어의 한계를 직관하는 시인조차 결국 언어로써 그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언어의 끝은 언어이며 우리는 늘 처음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4. 언어는 사용자의 발화를 늘 벗어나 엉뚱한 곳에 착륙하며 매순간 다른 언어로 미끄러진다. 우리는 우리의 내면 깊숙이 잠겨 있는 ‘말’들을 꺼내지 못하며 자꾸만 지연시킨다. 마치 영화 「메트릭스」에서 기계-안드로이드가 프로그래밍한 인간들의 달콤하고 헛된 꿈과 같은.2) 그러므로 ‘시’를 발화한 시인의 손끝에는 시인조차 지각하지 못한 무수히 많은 언어들이 겹쳐진 채 유동하고 있으며, 그것은 그가 문장을 쓸 때마다 기하급수적으로 증식한다.3)
5. 시인이 시에 대해 확정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다. 최초의 발화자로서의 이름이 그것이다. 이것 말고는 시인이 시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는 해석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으며 설령 주장한다 하더라도 참고문헌 맨 마지막 숫자만 겨우 차지할 뿐이다. 작품은 그것을 읽고 다시 쓰는 무수한 익명의 수군거림으로 현존하는 것이며, 그 익명들이 절대로 단일 주체로서 호명될 수 없는 언어적 판타스마고리아(fantasmagoria)4)로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6. 말라르메는 작품에서 행위 곧 의미작용의 주체는 저자가 아니라 ‘언어’ 그 자체라고 말한다. 만일 저자가 ‘주체’가 된다면 시의 의미작용은 쓸모없는 일이 된다. 언제나 의미는 저자의 의도로 귀착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의미는 무한대로 증식하고 해석의 두 발은 결코 땅에 닿지 않는다.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의미작용이 기표와 기의의 끊어짐(분리)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의미작용이란 바로 언어 안에 공백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공백’이 시의 의미를 생산하고 확대한다.5)
7. 작품에서 ‘저자’(시인)는 그것의 완성과 동시에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은 저자로부터 해방되며, 내적 동일성으로서의 언어를 자기 증명의 원천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말라르메의 주장이 타당성을 얻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시’에서 ‘시인’을 만날 수 없다.
8. 그렇지만 무엇인가 불편하다. 작품의 완성과 동시에 ‘저자’가 죽었다고 해도, 작품은 누군가로부터 끊임없이 발화되고 다시 쓰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의미작용의 주체라는 것을 인정해도, 작품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언어를 멈추게 하고 덧칠하며 괄호로 묶어버리고 삭제하기도 한다. 단어 하나하나는 물론이고, 문장과 문장의 행간에도 이 목소리는 존재한다. 분명, 그 목소리가 저자의 것은 아니다. 바르트는 이에 대해 ‘필사자’(scripter)라는 낯설고 기능적인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말한다; “현대적인 필사자는 자신의 텍스트와 동시에 태어난다. 그는 자신의 글쓰기를 선행하거나 초과하는 존재를 어떤 방식으로든 갖고 있지 아니하며, 자신의 책이 술어가 되는 그런 책의 주어가 아니다. 거기에는 단지 언술행위의 시간만이 존재하며, 모든 텍스트는 영원히 지금 여기서 씌어진다.”6) 요컨대, 저자를 대체한 ‘필사자’는 작품이 생산되고 (독자에게) 열리는 모든 순간에 개입해 텍스트를 (다시) 쓴다. 의미작용을 통한 공백의 발생에는 텍스트의 그림자와 같은 ‘필사자’가 존재한다.
9. ‘저자의 죽음’이 함의하는 바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독자의 탄생을 전제로 한 것임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 비극적 파토스에는 현대사회의 불확실성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담겨 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7)라는 루카치의 고백을 보라. 주체의 분열 혹은 파국이라는 현대의 극단적 상황에서 ‘세계와 자아의 서로 다르지 않았던’ 고대 그리스의 완결된 문화를 동경하는 한없이 순수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아닌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버린 ‘저자의 죽음’은 근대적 ‘저자’의 개념으로는 현대문학의 급진적이고 다성적이며 전에 없이 주관화되어버린 문학-현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자기반성과 통찰에 근거하며, 이것은 언어 예술에 있어서 더 이상의 창조적 행위는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불안의식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특히 후자는 텍스트 바깥에서 실존하는 ‘저자’의 실체마저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옛날로부터 이어져 내려오고 지금을 거쳐 미래를 관통하는 텍스트들의 거대한 용광로(저자)에서 우리가 사유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무엇이 나오기란 요원하다. 해 아래 완전히 새로운 텍스트는 없다.
10. 언어와 인간 ‘사이’, 언어와 시 사이에 ‘필사자가’ 있다. 그는 양자를 매개하고 (언어에 시인이 주화입마 되지 않도록) 적절한 균형을 맞추면서 ‘시’를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필사자라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언어는 공백과 더불어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8)라는 글쓰기의 제로-지대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이미지의 돌연한 멈춤과 가속, 아주 느리지만 때로는 전광석처럼 빠른 돌출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모두 필사자가 다시 쓴 작품의 구멍의 때문이라 해도 무방하다. 시에서 시인을 만날 수 없다면, 또한 ‘필사자’에 의해 작품의 의미작용이 가능해지는 것이라면 저자로서의 시인은 그가 어떤 존재라 할지라도 시의 본질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다. 소리를 언어로 분절하고, 다시 언어를 ‘시’로 분절하는 주체가 시인이 아니라 해서 경계할 이유는 없다. 중요한 것은 작품 내부에 존재하는 목소리다.
11. 안드로이드는 인간의 언어를 굉장한 속도로 습득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진화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조만간 인간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 능력의 경계를 뛰어넘을지도 모른다. 창작은 이제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소설의) 플롯을 착상하고 구성하며 배치할 수 있고 시 또한 쓰고 있다. 저자가 죽은 상황에서 등장한 ‘필사자’가 안드로이드인들 신기하거나 특별할 것이 없다.
12. 그런데 왜 우리는 ‘안드로이드가 시를 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도 우리는 시가 전적으로 시인의 소유이며, 시인이 자신의 삶과 시대, 그리고 언어에 대한 통찰(혹은 ‘극단적 회의’)의 결과라고 믿기 때문이다. 1968년 필립 K. 딕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라는 도발적이고 암울한 SF소설을 출간한다. 안드로이드 사냥꾼인 주인공 릭은 문득 이렇게 자신에게 묻는다. “안드로이드도 꿈을 꾸나?”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되짚어보고 그렇다고 대답한다. 안드로이드도 더 나은 삶을 위해 꿈을 꾼다는 것이다; “안드로이드도 꿈을 꾸나? 릭은 속으로 물었다. 그건 분명해. 그들이 때때로 주인을 죽이고 이곳으로 도망치는 이유도 그것이니까. 더 나은 삶, 노예 신세가 아니라. 루바 루프트처럼 말이야. <돈 조반니>와 <피가로의 결혼>을 노래하는 거지. 황량하고 바위투성이인 지표면을 힘들게 오가는 것 대신에 말이야. 근본적으로 거주가 불가능한 식민 세계에 사는 것 대신에 말이야.”10)
13.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꾼다. 그것은 의인화된 욕망이 아니라, ‘그’가 처한 절망적인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일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꿈속에서도 시를 쓰는 것이고(꿈은 시와 가장 가깝다), 시의 최초의 발화자가 되는 것이며, ‘필사자’로서 시간에 흔적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안드로이드는 ‘좋은’ 시를 쓸 수 있을까. 그것은 독자가 판단할 일이다.
1) 필립 K. 딕의 SF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1968)에서 따옴. 이 작품은 훗날 리들리 스콧에 의해 「블레이드러너」로 재탄생한다.
2) 「메트릭스」(1999)에서 인류는 컴퓨터의 자기 생존을 위한 일종의 ‘건전지’로 사용된다. 인큐베이터에서 배양되는 인류는, 컴퓨터가 프로그래밍한 다양한 환상을 꿈꾼다. 단순한 영상-이미지가 아닌,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감각과 지각의 이미지들.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데리다의 말은 여기에 정확히 일치한다.
3) 따라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르네 마그리트)라는 현대 사유의 첨예한 역설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가진다. 언어는 현실이 아닌 ‘언어의 궤도’에서 무한 회귀한다. 언어의 ‘안’은 언어이고 다른 것이 아니다. 지시대상은 언어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언어-이미지다.
4) ‘판타스마고리아’란 주마등같이 변하는 광경을 지칭하는 단어로 일종의 환상, 환각, 착시의 세계다.
5) 바디우에 따르면 ‘공백’은 ‘분리’와 유사한 개념이다. “공백은 [무엇인가를] 분리하는 것이다. 사실 공백은 존재의 토대이지만, 드러난 것으로서 그것은 순수한 간극이다.”(알랭 바디우, 『비미학』, 장태순 옮김, 이학사, 2010. 203쪽) 작품 속에서 언어의 의미는 고정되지 않으며, 끊임없이 다른 언어들을 불러들여 의미를 충돌시키고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때 언어에는 일정한 구멍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것이 ‘공백’이다.
6) 롤랑 바르트, 「저자의 죽음」,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 옮김, 동문선, 2002, 31~32쪽. 또한 바르트는 필사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저자를 계승한 필사자는 이제 더 이상 그의 마음속에 정념이나 기분・감정・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다만 하나의 거대한 사전을 가지고 있어, 거기서부터 결코 멈출 줄 모르는 글쓰기를 길어올린다. 삶은 책을 모방할 뿐이며, 그리고 이 책 자체도 기호들의 짜임, 상실되고 무한히 지연된 모방일 뿐이다.”(같은 책, 33쪽)
7) 게오르그 루카치, 『소설의 이론』, 반성완 옮김, 심설당, 1985. 29쪽.
8) 헤테로토피아는 온갖 장소들 가운데 절대적으로 다른 장소로 일종의 반(反)-공간이다. 그곳은 현실화된 유토피아이며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있는 장소다.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서, 어떤 의미로는 그것을 지우고 중화시키고 혹은 정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장소”라는 것(미셀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13쪽)
9) 이하 내용 및 인용문은 다음 사이트 참고: http://www.factoll.com/page/news_view.php?Num=3027
10) 필립 K. 딕,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박중서 옮김, 폴라북스, 2013, 278~2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