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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의 언어 혹은 발화의 물질성 (1)

금요일의 시창작 노트 part.3_ 제2장 환상-시

by 박성현


일인칭의 언어 혹은 발화의 물질성 (1)






‘발화’와 동시에 사라지는 언어, 그것이 시다. 시인의 손끝이 문장으로 꽉 찬 백(白)의 공간을 떠나자마자, 그리고 세계가 시인의 내면을 통해 새롭게 재구성되자마자 그 언어는 나타난 적이 없다는 듯 사라진다.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망각이나 상실이라 부를 수 없으며, 또한 죽음이라는 깊고 깊은 어둠으로도 일컬을 수 없다. 발화와 함께 사라지는 언어, 그것은 ‘시’의 나타남이라는 일회성의 은밀한 아우라aura이며, 시인이 자신의 모든 경험을 통할(統轄)하는 사유와 감각의 순간적인 집중이다. 다시 말하자. 시의 언어는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됨으로써 시인의 손끝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진다.


특이한 것은 이 창조적 행위에는 그 어떤 통일된 규칙이 없다는 점이다. 개인-속-에 각인된 사건의 고유한 얽힘에 따라 그리고 그에게 잠재된 혹은 펼쳐질 사건들의 농도에 따라 문장이 엮어졌기 때문이고, 그 과정에서 ‘세계’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오로지 대상을 사로잡은 발화자의 주관에 근거할 뿐임으로, 다른 말이나 사유로는 대체 불가하다. 시인의 문장은 단 한 번 떠오르는 것이며 그 일회성은 나타남과 동시에 사라진다.


‘일인칭의 닫힌 언어’라 해도 이상한 것 없는 이 언어는 특이하게도 우리가 아는 모든 문법의 바깥에 위치하며, 그럼으로써 문법의 내부를 파열하고, 일상어를 무력화시킨다. 우리가 이 백색의 언어에 ‘문법이 없다’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언어들은 피부에 눌러붙은 피처럼 응고된 침묵이며, 눈부신 백사장 위에 찍힌 수많은 발자국이다. 푸코의 말을 빌리면, 그 언어의 더미는 “그 자체로, 언어의 내부에 뚫린 하나의 거리, 끊임없이 주파되지만 결코 실제로 뛰어넘어지지는 않는 하나의 거리”1)다. 우리는 이 언어들을 차라리 존재의 부정합성이라는 언어의 ‘공백’으로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 언어는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만큼 부피와 무게, 질감이 뚜렷하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발화의 내부로 사라진 언어는 이미 혀의 일부분이다. 죽음이 우리 삶에 남아 있지 않지만 매 순간 뚜렷한 흔적을 남기는 것처럼, 혹은 F. 베이컨의 일그러진 육체들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감각의 한 가능성으로 남아 있는 것처럼. 그것은 결코 소비(유통)되지 않으며 존재의 살과 뼈에 깊숙이 실존한다. 이 첨예한 현상은 우리가 ‘시’라 명명하는 사태의 일부다. 랑시에르가 적절히 지적한 바, “사물 자체가 침묵하고 말하는 방식”2)으로 (대상과 함께) 우리에게 나타난다.


무엇보다 시는 언어를 대상의 생생한 나타남으로써 우리를 사유한다. ‘시’에 내재한 문장들, 행간에 스며든 이미지와 목소리, 그리고 단어들의 배치라는 시의 시각적 형태 등은 모두 그것에 대한 표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는 언어의 가장 순수한 본질이며, 감춰지고 왜곡된 현실을 꿰뚫고 다시 엮어냄으로써 그것을 적확히 묘파하는 일종의 ‘물질화된 발화’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발화의 물질성은 시적 대상과 시인의 무모순성을 말해주는 것이며, 동시에 시인과 작품의 완벽한 단절을 말해준다.


시인은 세계를 ‘물질적으로’ 몽상한다. 그리고 그 몽상 속에서 우리가 쉽게 지나쳤던 것, 혹은 미처 몰랐던 것들을 단독의 언어로 형상한다. 이때 ‘언어’는 시인에게 사물들의 집적이고, 실체이며, 관계의 지도이자 세계를 관통하는 문이다. 이는 시가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단순한 집합논리가 아니다. 사물이 어떤 질서로 이뤄져 있는가에 대한 통찰이며, 사물을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불가지 혹은 근원적 공포에 대한 저항이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는 시인에게 사물의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곳에 이를 수 있게 하는 열쇠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시는 물질의 상상력이면서 동시에 지도 곧, 내면의 등고선이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다’라는 동사에 이를 수 있게 하는 어떤 통로인바, 우리는 그 원근과 명암 속에서 길을 잃거나, 길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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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언어 속에서 시인은 ‘나타난다.’ 이 나타남은 우리에게 ‘시인’을 통째로 상상할 것을 요구한다. 이때 우리는 직접적이면서도 치밀하게 시인의 몸을 흘러가는데, 그것은 이른바 몽상의 직립이라는 이미지의 분출을 통해서다. 마치 수만 개의 성운에서 단 몇 개의 성좌가 엮어지듯, 우리는 시인의 언어에서 ‘시’라는 언어의 절대적 영역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언어 속에서 오직 시인만이 현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시인은 언어의 즉자적 존재이며, 세계의 미래가 된다. 그것은 묵묵히 흘러가며 유역을 만들거나, 사구(砂丘)의 급격한 기울기를 형성하기도 한다. 모두 언어 속에서 시인이 엮어지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문장을 발화(發話)한다는 것은 단순히 타자와의 의사소통 가능성만을 타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적극적인 행위다. 특히 시-문장의 나타남은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경험을 넘어서는 예외적 문장의 산출이며 동시에 한 사람의 시인이 세계라는 다중(多衆) 속에 정립되는 일인 까닭에 문장의 발화는 엄밀한 의미에서 존재의 각성과 같은 효과를 가진다. 때문에 문장의 발화란 시인에게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축적하면서 그것의 지향을 넘어서려는 의지와 이념의 집중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비경은 오로지 언어를 통해서만 다가오는데, 왜냐하면 감각과 사유의 판단은 오로지 언어에만 할당된 몫이고, 또한 세계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그 지향을 설정하며 의미의 산출을 경계 짓는 것이 언어의 고유한 축성(築城)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발화된 문장은 세계 그 자체다.


1) 미셸 푸코, 『문학의 고고학』


2) 랑시에르, 『이미지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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