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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의 언어 혹은 발화의 물질성 (2)

by 박성현



일인칭의 언어 혹은 발화의 물질성 (2)





밀실에서의 코끼리-되기


이러한 문장의 생성을 둘러싼 사태는 두 가지 방향으로 흘러간다. 하나는 시의 표면에 작동하는 의미의 일방통행이고, 다른 하나는 문장의 행간과 공백을 가로지르는 ‘독백-체’의 은밀하고 단호한 전이(轉移)들이다. 배치된 질서에 따라 자연스럽게 의미를 파생하는 것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무질서라는 용광로에 문장을 융해(融解)하여 의미의 낱낱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금기마저 이끌어내는 것이 후자에 해당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문장들은 이 두 가지 극단을 가지고 있으며, 사태의 추이에 따라 어느 한 좌표에 안착된다.


때문에 우리는 의미의 나타남을 그 자체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특히 시의 의미에 대해 그것이 원래 시-속-에 내재해 있다는 형식주의적 발상도 맹신해서는 안 된다. 표면 혹은 행간(‘공백’)이라는 이중 장치가 시의 내적 구조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들이 세계로 향해 활짝 열린, 문장의 유일한 창(窓)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들길을 통해 숲과 호흡하듯이 문장을 읽고 그것에 스며들며 ‘언어’와 ‘세계’의 경계를 확장하는 놀라운 역설과 변증들이 시의 심장을 관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발화는 시인 자신으로 기울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발화된 것은 오히려 ‘세계’가 아니라 시인 자신이라는 말이다. 요컨대, 세계를 내면화하면서, 세계를 다시 만드는 ‘시인’이라는 예외적 존재는 특이하게도 문장을 ‘발화’함으로써만 자신을 드러낸다. 이것은 시라는 사태에 내재한 배려나 욕망의 나타남이 아니다. 하나의 얼굴이 표현할 수 있는 수만 가지 표정에 대한 서사이며, 이러한 까닭으로 우리 시의 첨예한 현상에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질문은 좀 더 단순해진다. 시는 무엇을 개시하는 것일까. 문장이 지시하고 의미하는 바에 따라 축조되는 세계일까. 아니면, 시인의 언어를 통해 재구성되고 재배치된 현상으로서의 세계일까. 혹은 시인 자신의 날것들일까. 발화된 문장이란 무엇이며 시와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다시 말해, 세계는 시인이라는 예외적 존재가 발화한 문장을 어떻게 내면화하는가.



버릴 것이 생길 때마다 노래를 불렀다 코끼리 너머엔 코끼리가 가득하고 코끼리는 가장 코끼리에 가까워 누군가 문을 두드려주길 기다렸다 방 안 가득한 냄새를 버리러 갈 수 있도록


아무도 노크하지 않았는데 회색 코트를 입은 아빠가 걸어 나왔다 종이봉투처럼 구겨진 얼굴을 하고 배고픈 강아지가 뒤따라 나왔다 입 안에 웃음을 뒤지려고


외로움이 눌어붙은 갈색 소파가 접시 위에 먹다 남긴 후회가 바닥에 흘린 목소리가 차례로 버려지는 동안 나는 코끼리가 가벼워진다고 믿었다 그건 정전이 되는 일 내 안에 동물이 두 눈을 번쩍 뜨는 일 비로소 창밖이 환해지는 일


창밖은 내가 내다버린 것들로 가득했다 누군가 앉은 의자 누군가 쓰다듬은 고양이 누군가 넘어뜨린 여자 내가 버리지 않은 것들로도 가득했다 비가 내리는 저녁 달리기 좋게 휘어진 저녁 거실에 혼자 있는 저녁


문을 열자 쓰레기 더미가 움직였다 풍선처럼 조금씩 부풀면서, 운동화 모양의 귀를 달고서, 의자로 된 다리를 내딛으면서,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쾅 소리를 내며 닫히고 있었다


어디로 갈까? 코끼리가 말했고 어디로든! 내가 말했다 나는 키가 한 뼘 자란 채로 코끼리는 코가 잘린 채로 텅 빈 도로를 걸어갔다 코끼리 이후엔 코끼리가 가득하고 코끼리는 코끼리에게서 가장 멀어 우리가 부른 노래들이 쿵쿵 따라오고 있었다

— 임지은, 「코끼리의 이동」 전문



‘그/그녀’가 방안에 있다. 방안에는 ‘그/그녀’가 쏟아낸 냄새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외로움이 눌어붙은 갈색 소파”, “접시 위에 먹다 남긴 후회”, “바닥에 흘린 목소리”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그/그녀’는 방안에 배치된 사물(혹은 그림자)들을 보며, 그것의 중력이 상당히 느슨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간극이 좁혀지거나 포개질 때마다 사물은 바스러지며 제로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접촉이란 부패가 시작되는 지점이 아닌가. ‘그/그녀’는 그것들의 이름을 붙여본다. 거실이나 식탁, 그릇, 커피포트, 혹은 ‘코끼리’나 ‘회색 코트를 입은 아빠’, ‘배고픈 강아지’라 부른다. 호명하면서, ‘그/그녀’는 계속 자신도 부패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것이 ‘그/그녀’가 계속 ‘방안 가득한 냄새’를 버리는 이유다. 자신이 부패한다고 느끼는 것은 착각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본능이면서 동시에 ‘쓰레기’로 가득한 자본주의에 대한 직관이다. ‘그/그녀’는 부패하면서도 계속 호명한다. 아빠를 부르면 그는 구겨진 얼굴을 하며 회색 코트를 입고는 배고픈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다. 정지버튼을 눌러서 그 장면을 멈추고는, 입안을 뒤져 억지로 웃음을 꺼내지만 ‘부패하는 냄새’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번에 ‘그/그녀’는 코끼리를 부르고 단숨에 복화(複話)를 시작한다. “코끼리 너머엔 코끼리가 가득하고 코끼리는 가장 코끼리에 가까워”라는 문장에서 나타나듯, ‘그/그녀’의 복화는 집요할 정도로 구체적이고 간결하다. 문제는 ‘코끼리’는 혓바닥과 입술 사이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데, 반복하면서 그 복화의 주체가 누군지를 점차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그/그녀’가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코끼리’가 말하는 것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워졌다는 말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 ‘밀실’에서 주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말하는 것’─다시 말해 방안의 사물들에 언어적 상상 혹은 기화로 작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그/그녀’는 이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 “창밖은 내가 내다버린 것들로 가득했다 누군가 앉은 의자 누군가 쓰다듬은 고양이 누군가 넘어뜨린 여자 내가 버리지 않은 것들로도 가득했다”는 문장이 암시하듯, 창밖의 세계는 또 다른 ‘그/그녀’들의 밀실이다.


그러므로 ‘복화’란 주체가 사라진 순간에 나타나는 주체의 ‘시뮬라크르’simulacre다. “코끼리 이후엔 코끼리가 가득하고 코끼리는 코끼리에게서 가장 멀”지만, 그 ‘가득’과 ‘멂’의 간극은 제로다(코끼리에게서 가장 먼 ‘코끼리’도 코끼리다). 방안의 현실은, 주체에게 구속되지만 그 순간 멈춰버린다. 이 완전한 동어반복의 세계가 ‘그/그녀’의 현실이다. ‘저녁’이 몇 개의 또 다른 저녁으로 바뀌면서 뒤덮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가 내리는 저녁”은 “달리기 좋게 휘어진 저녁”이나 “거실에 혼자 있는 저녁”을 복화한다(‘복제’가 아니다!). 물론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쾅 소리를 내며 닫히고 있었다”는 고립이자 정체지만, 창밖에도 ‘그/그녀’가 내다버린 것들이 가득할 뿐이라면 스스로의 뫼비우스에 갇히는 것이 좋지 않을까. “엄마가 부러지면 엄마를 / 수건으로 / 둘둘 말아서 냄새 좋은 방에 널어두어야 한다”(「엄마 깁스」)는 식의 예의바른 문장으로.


하지만 여전히 ‘그/그녀’는 “얼룩뿐인 식탁”(「엄마 깁스」)에 앉아 “버릴 것이 생길 때마다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코끼리는 그들에게 여기 저기 ‘버릴 것’이 있다고 속삭인다. 이러한 주체와 ‘주체 아닌 주체’의 복화, 뫼비우스의 띠에서 과연 주체는 존재할 수 있을까. ‘나’에게 타인이란 나타나는 것이 아닌, 만드는 것이고, 때문에 ‘그/그녀’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은 ‘나’라는 주체와 전혀 무관한 채, 마치 일련번호가 매겨진 상품들처럼 소비된다. 세상의 모든 ‘나’는 무인칭이자 3인칭이 됨으로써(혹은 강요받음으로써), 스스로를 밀실로 만들어버린다. 만일 바깥으로 나간다 해도 그들은 아무도 없는 “텅 빈 도로를 걸어”갈 뿐이다. 출구는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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