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의 시창작 노트 part.3_ 제2장 환상-시
시와 논리
문장이 발화된다는 것은, 이제 막 태어난 생명이 세상을 향해 첫 울음을 터뜨린다는 것과 동일하다. 그것은 새로운 사태의 발생이자 독립적인 사물의 출현이고, 의미를 낱낱이 밝혀야 하는 수수께끼의 일어남이다. 그 심연에서, 우리는 문장과 관련된 아주 작은 실존이라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태와 사물, 수수께끼는 모두 ‘작품’이라는 일의적 욕망을 향해 돌진하는 세계에 대한 ‘판단’과 ‘책임’의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문장의 발화가 주체의 내적 필연성이면서 동시에 우발적 행위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적어도 하나의 문장이 세계에 던져지기까지 발화자의 일생이 관여하며, 그 사건의 시점은 발화자가 예측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문장의 발화는 시작하자마자 멈추었다가 어느 순간 다시 이어지고, 다른 문장을 넘나들며 소스라친다. 이러한 과정에서 문장은 자신의 고유성을 강화하고,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사물로 우리에게 펼쳐진다. 문장에 남은 일반적인 규칙은 오직 ‘발화’ 그 자체에 내재한 논리다. 논리가 무시된 채 발화되는 문장은, 곧바로 ‘하데스’(Hades)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문제는, 발화된 문장이 주체의 자기 확신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문장은 발화되면서 오히려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것은 내적 필연성과 우발성의 더미로써, 마치 강이 휘어지고 계곡이 생기는 것처럼 온갖 주변을 접속하면서 계열과 내륙을 만든다. 문장만이 자신이 가는 길의 지문이다. 이제 문장은 창작자와의 모든 연결고리를 끊고, 스스로 만들어내는 안개 속을 걷는다. 창작자의 지문은 단지 그 문장이 발화된 역사적 기원을 표시할 뿐이다.
그러므로 ‘발화된 문장’이란 세계 그 자체이며, 논리적 한계 내에서 세계의 모든 필연성과 우발성을 일으켜 세우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침묵이다. 그것은 주체와 타자가 동시에 작용하면서 세계-속-에 스스로를 내던지는 ‘통증’이나 혹은 지금 이 순간의, 주체와 타자, 그리고 익명이 뒤엉킨 채 생생하게 쏟아내는 ‘목소리’와도 같다.
겨울 오니 살겠네
푸른 손으로 춤추던 나무들
잠 속에서 울던 벌레들
따뜻한 척 손 잡던 햇빛도 떠났네
가구에 씌우는 하얀 천처럼
눈이 내리네 펑펑
그만 가라고 지워지는 기억들
이제 사랑은 사람에게 머물지 않고
남은 시간은 마지막 악보를 넘기니
이 얼마나 다행인지 겨울이 온다는 게
차가운 네 속에 얼어붙었네
— 전윤호, 「동면」 전문
겨울이다. 죽음처럼 풍경들이 까마득히 물러나고 있다. 구름과 별도, 바람과 숲도, 냄새와 두께도 빙하처럼 단단해지는데, 그들의 동면은 아주 조금씩 소진될 뿐이다. 역설적으로 겨울은 용광로와 같다. 눈에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은폐하고, 은폐함으로써 금지하기 때문이다 겨울은, 단순함 외에 그 어떤 수사(修辭)도 허용하지 않는다. 가장 늦게까지 눈을 뜬 ‘결핍’이자 결말 없는 ‘결말’로서 장소의 부재인 것. 그런데, 시인의 문장은 뜻밖에도 “겨울이 오니 살겠네”다. 무슨 이유일까. 비밀은 그 문장의 주체가 누구인지 밝히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문장 생성과 발화의 주체를 시인으로 쉽게 환원한다. 용광로처럼 주체가 그 속에 녹아들어 있으니 그런 환원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미세하게 어긋나고 균열되는 경우가 많다. “겨울이 오니 살겠”다고 말한 이, 시인에게 그 문장을 건네준 이는 과연 누구일까. 겨울이 오고 마지막 온기마저도 거두어질 무렵 척박한 겨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살겠다’고 되뇌는 사람은 누구였던 것일까. 시인의 문장 속으로 스며들어 투명해지고, 더 먼 곳을 향하는데 겨울을 반겨야 하는 모진 생(生)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 것일까. 겨울은 온갖 소리들을 침묵으로 돌려세우면서 대지의 모든 사물들을 두껍고 단조로운 흰 천으로 덮고 있는데.
다시 겨울이다. “푸른 손으로 춤추던 나무들 / 잠 속에서 울던 벌레들 / 따뜻한 척 손 잡던 햇빛도 떠났”다. 겨울이 오니 사랑도, 이제는 사람에게 머물지 않는다. 사물 안에 깃든 영혼도 남김없이 사라졌다. 마지막 장의 악보처럼, 페이지를 넘겨버리면 어떤 여백도 없다. 그러나 겨울이다. 겨울은 시간을 돌려세우고, 권태와 무기력이 자리 잡을 수 없을 만큼 지상의 모든 것이 흑백으로 갈라 세운다. 멈춰선 듯하지만 이미 모든 것은 자기-속-으로 맹렬하게 빨려 들어가고 있다. 껍질 속의 알과 같은 이 뜨거운 ‘자기-속-으로’ 당신이 흡입되는 것이다.
따라서 ‘겨울이 오니 이제야 살겠다’는 발화는, 타자들이 자신에게 던져진 비밀을 풀고 타자 그 자체로 완연하게 발현되는 생생한 표현이다. 겨울을 매개로 온전한 ‘나’로서 더욱 선명해지는 것은 오히려 주체로서 윤리와 책임을 더욱 공고히 하는 일이다. ‘자기’를 지키는 것이 퇴락으로 정초되는 비본래적 일상에서 우리가 실존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와 다르게 김재홍 시의 발화점은 0℃ 아래다. 통상의 시인들이 사건의 재현을 통해 서정을 만들어내는 것과는 달리(모든 언어는 사물과 사건의 재현이다), 그는 사물의 ‘사물성’, 사건의 ‘사건성’을 다룸으로써 사물과 사건이 존재할 수 있는 격자와 무늬를, 그 제로의 좌표를 일으켜 세운다. 이것은 명백히 현실태로 모이는 가능태의 최대치가 아닐까(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주름이 펼쳐지는 극도로 예민한 단순성이고, 일몰의 붉은 빛에 덮이는 거대한 일의성이자 동시에 무한에 가까운 대상들이 제각기 목소리를 내는 다성(多聲)과 화음이다. 요컨대, 최적화된 사물과 사건으로서의 충만한 ‘그것’이 아니면 결코 아무것도 아닌 이름-이전-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때문에 김재홍 시인은 이러한 ‘제로-디그리’zero degree의 아찔한 순간들을 계열로 이동시키면서 이름이 아닌 ‘인칭’이라는 규정되지 않은 주체의 놀라운 익명성을 만들어낸다.
가령 이 세계가 우글거리는 이념들과 번쩍이는 어두운 전조들과 강도들과 문제들과 차이들의 무한한 일의성이라면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고 외친 김수영이라거나, 분노와 원한과 저주 같은 것을 끊임없이 빨아올리고 뿜어대는 충만한 신체라면
부글부글 이글거리는 분화구거나 태풍이거나 그 눈동자거나 규정될 수 없는 규정되지 않는 규정할 수 없는 열정과 절망과 환희와 운명의 극한이라면
인칭은 언제나 펄펄 끓는 뜨거운 핏줄을 퉁기며, 그 박동과 함께 영혼과 함께 뛰어다니며 솟구치며 욕망하는 기계의 욕망하는 생산을 욕망할 수 있다면
— 김재홍, 「인칭은 언제나」 전문
이 문장들은 김재홍 시의 창발성을 압축하고 있다. 특히 시적 사유를 사건의 발생 이전으로 돌려놓고, 문장에 내재한 모든 주름들의 논리적 펼쳐짐에 집중하는 독특한 작법(作法)은, 시가 현실의 재현이나 대칭이라는 전통적 관점의 붕괴를 요구한다. 그에게 사건이란 언어에 내재한 가능성의 한 가지며 그러한 이유로 주체는 ‘존재’라는 사건의 효과로 재구성되고, 의미작용(구조)의 일정한 선분 내로 물러난다.
데카르트의 성찰과는 달리 ‘생각’은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닌, 항상 대상에 대한 주체의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지향을 통해서만 일어난다. 의지만으로 생각을 이끌어낼 수는 없으며 반드시 대상이 매개되어야 한다. 어쩌면 ‘생각’이란 비의지적 활성화다. ‘코기토’는 행위 주체의 이념과 의지와는 상관없으며, 대상으로 돌진하는 생각의 치열한 부딪침만이 활성화를 유도할 수 있다. 후설이 의식을 지향으로 파악하고,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으로 재규정한 것도 이러한 이유다. 생각은 끊임없이 흐른다. 움푹 들어간 웅덩이에 쏟아져 고립되고 혹은 수많은 문턱을 넘어 단순함의 극단으로 치닫더라도 생각의 흐름 내에서 주체는 끊임없이 유보된다. 마치 욕망에 미끄러지는 기표들의 망설임처럼 말이다. ‘나’는 주체의 절대적 자아가 아닌 언제나 당신이자 그/그녀다. 사정이 이러하니, 주체는 ‘인칭’의 부가물이자 표면효과라도 무방할 정도다. 의미작용의 표면(혹은 심층)에서 ‘주체’로 분절되는 이 문장의 발화는, 용광로와 같은 뜨거운 인칭을 뒤로 하고 존재와 함께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 이제야 우리는 ‘인칭’이라는 잠재적 사건-주름들이 “우글거리는 이념들과 번쩍이는 어두운 전조들과 강도들과 문제들과 차이들의 무한한 일의성”으로 펼쳐지는 생생한 욕망의 세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코키토’로 존재보다 앞선 어떤 것으로 가정되었지만(데카르트), 실은 ‘주체-의-있음’이란 사건은 역설적이게도 ‘코키토’의 내륙에서 존재의 부가물로 재활성화된다. 주체보다 존재가 먼저다(레비나스). 때문에 “인칭은 언제나 펄펄 끓는 뜨거운 핏줄을 퉁기며, 그 박동과 함께 영혼과 함께 뛰어다니며 솟구치”는 동시에, “욕망하는 기계의 욕망하는 생산을 욕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칭은 주체를 포괄하며 주체의 논리적 가능성을 수렴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는 김수영의 인용은 주체와 인칭을 어떻게 분할되는가. 이 질문은 이렇게 변용된다. 그 문장은 주체와 인칭을 세계-속-에 어떤 방식으로 기입하는가. 혹은 문장의 발화점에 포착된, 주체와 인칭의 무수한 흔적들은 욕망을 어떻게 일으켜 세우는가. 결론을 내리기 전에 욕망이란 항상 주체를 비켜간다는 것을 상기하자. 욕망이 하나의 기표로 고정되지 않기 때문에, 주체는 다만 ‘그것’(이드)에 근접하고 에둘러 갈 뿐이다. 이사벨 버드 비숍 여사에게 향한 김수영의 욕망은 하나의 인칭으로 변해, 다시 김재홍 시인의 문장 속으로 스며든다. 조선에서 근대로, 근대에서 현대로 이동하는 시점, 곧 ‘인칭’은 욕망을 미시적 분할이 아닌 덩어리로 내재화하면서 사건을 이끈다. ‘인칭은 언제나’ 존재의 주름이 펼쳐지는 생성의 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