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의 시창작 노트 part.3_ 제2장 환상-시
일인칭의 언어 혹은 발화의 물질성 (3)
유령들
상상해보자. ‘그/그녀’는 주말 아침마다 (1인용)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고, 오후에는 짧은 산책을 하며, 간혹 스크린에 집중하는 애인의 겨드랑이에 파고들어 은밀한 농담을 주고받는다. 회사에 출근해서도 ‘그/그녀’의 맥박은 동일한 간격으로 뛰고, 지루해진 오후 4시에는 티타임을 가져 잠시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그 어떤 경우에도 그들은 세계와 무관한 채로, 매순간 자기 자신에게 몰입한다. 1인용이기 때문에, ‘그/그녀’는 항상 웃고 떠들며 가벼워진다. 외출하기 전에는 항상 거울을 보며, 패션에 대한 타인의 취향을 묻듯, 자신의 대칭을 깊고 조용하게 응시하지만, ‘그/그녀’가 보는 것은 자신의 얼굴이 아니다─불행하게도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결코 본 적이 없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수많은 ‘그/그녀’의 반응을 기다린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몇 겹의 표정을 벗기며 세수를 하거나 화장을 지운다. ‘그/그녀’가 꾸는 꿈조차 홀가분한 1인용이다. 타인과 단절된, 가장 안락한 무덤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다시, 상상해보자. ‘그/그녀’는 1인용 식탁에 앉아 있고, 알맞은 조도의 주방 등은 그들을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고 있다. 입속에서 음식물은 상호 침투하고 소멸하며 확산하지만, 그 맛의 정체는 인스턴트다. 그런데도 홈쇼핑 광고는 아직 형체를 갖추지 못한 ‘기분’을 다시 배열하고, 분해하며, 재구성하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3분 요리를 소개한다. 그리고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여름을 찾아낸다. “환경미화원이 거리에 플라스틱나무들을 심어놓았다 / 덕분에 여름 내내 날씨가 화창하였다”(「비키퍼」)는 다정한 감정들과 함께. 하지만 곧바로 그 ‘감정’은 무너진다. “여름은 더 이상 나의 주제가 아니었”(「새가 없는 곳」)기 때문. “왼손 깊숙한 어딘가의 검은 화상”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잠의 귀를 둥글고 캄캄하게 벌”리는 ‘그/그녀’는 어쩌면 수도 없이 “앵무새들이 길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앵무새들」)을 받았을 것이다. “자꾸만 솜사탕과 무지개를 혼동”(「비키퍼」)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도대체, 이 ‘느낌’의 정체는 무엇일까. 왜 ‘그/그녀’는 자신이 길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새장 속에 갇혀 있는 것일까. “바다의 색깔을 알고 싶은 장님”과 같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를 감행하면서도 그것이 명령이었기 때문에 죄의식을 갖지 않았다는 점이다(그는 자신도 ‘명령’의 희생자라 주장했다).
유령은 몸의 접히는 부위들에도 음영이 없겠지
날 선 소매가 스칠 때마다 포르말린 냄새가 날 거야
죽은 말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물시계 속에 한참을 누워있었다
여름은 더 이상 나의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작은 사과의 퇴색,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흰 봉투의 편지들, 솔잎 향과 피 냄새가 섞인다
눈송이를 쥐려는 사람의 손바닥은 쇠의 빛깔이겠지
코를 막고 붉은 커피로 입 안을 헹궈내는 심정일 거야
계피색 델리카트슨 가게들이 진흙빛 파도가 되어 달려든다
원근을 잃은 창문들의 만조와 간조, 나는 바다의 색깔을 알고 싶은 장님처럼……
안개상자를 쥐고 흔들면
침전물처럼 떠오르는 박제동물들, 모조눈동자들이 빛바랜 사진처럼 눈물을 흘렸다
전선을 두른 파인애플을 껴안고 잠시, 따라 울고 싶어졌습니다
깨진 화분인 줄 알았어요
사람을 철새에 비유하다니 무례하군요
죽음에 대한 소문을 머플러처럼 두른 유령이 길을 건넌다
그들이 바다에 빠진 조각상의 잘린 손목을 건져 올렸습니다
라일락은 죽지 않았어
발 밑에서는 여전히 꿈틀대는 눈뭉치
— 원성은, 「새가 없는 곳」 전문
가장 적극적인 의미에서 ‘음영’이란 존재들의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증명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물들의 상호작용이 집요하게 삼투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나타나지 않고, 감각할 수 없는 관념이나 추상은 이 ‘음영’을 왜곡하거나 존재의 바깥으로 밀어낸다. 당연하지만, ‘유령’은 빛을 투과하지 못하며 대지를 머물게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유령은 ‘공백을 가질 수 없음’이고, 또한 ‘생성의 멈춤’이다.
‘그/그녀’는 기묘하게도 “날 선 소매가 스칠 때마다 포르말린 냄새”를 맡는다. 어딘가에서 생명이 사라지고, ‘유령’이라는 죽음들이 공집합을 이루며 흘러 다닌다. 거리는 이상하리만치 ‘암시적’이다. “죽은 말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물시계 속에 한참을 누워있”어야 할 정도로 뜨겁게 가라앉고 있다. “작은 사과의 퇴색,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흰 봉투의 편지들, 솔잎 향과 피 냄새가 섞”여 뭉개지는 것이다. 방금 지나온 빌딩의 여름은, 잘게 부서진 유리조각처럼 빛나고 있지만, 그것도 ‘그/그녀’의 주제는 아니다. 분명한 무언가가, 더욱 분명해질수록 끊임없이 사라진다. 여기 저기 정장차림의 ‘그/그녀’들이 빌딩 입구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문은 회전하고, 그것은 무기력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멈출 줄을 모른다.
아주 멀리서도 보이는 ‘계피색 델리카트슨 가게들이’ 정오가 되어도 그 ‘진흙빛 파도’를 놓지 않는다. 식당 내부에 도사린 어둠이 분명하게 ‘그/그녀’들을 지켜보고 있다. ‘어둠’에 잠식되어 음영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유령처럼 창문들조차 원근을 잃고 “모조나무들 사이”(「비키퍼」)에서 펄럭거린다. 거리는 이제 완벽한 징후—1인용 식탁에 앉은 ‘유령’과 별반 다를 바 없는—로 뒤덮인다. “꿈에서조차 뒤집힌 양말처럼 정직한 사람”(「앵무새들」)들도 얼굴을 가린 채 표정으로만 웃기 시작한다.
식당에서 음식을 씹는 ‘그/그녀’들은 아주 쉽게 말(言)을 소화시킨다. 아니다. 소화시킬 말들만 내뱉는다. “안개상자를 쥐고 흔들면 / 침전물처럼 떠오르는 박제동물들, 모조눈동자들이 빛바랜 사진처럼 눈물을 흘렸다”는, 이 잔혹하고 배타적인 타자-응시만이 X선처럼 ‘그/그녀’의 망막에 투과되기도 한다. “전선을 두른 파인애플을 껴안고 잠시, 따라 울고 싶어”진 ‘그/그녀’를 ‘깨진 화분’으로 오독하는 것도 일상적인 대화다.
이제 그들은 답을 알 수 없는, 혹은 답이 전혀 필요 없는 질문을 던진다; “그림자를 키우는 사람은 즐겁게 깊어질까? 안달이 나서 가늘어질까? / 나무그늘에 알을 슬어놓은 새의 이름이 궁금하다”(「비키퍼」). 여기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그 어느 누구도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그/그녀는 이미 “죽음에 대한 소문을 머플러처럼 두른 유령”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느낌’이란 문장으로 스며드는 공허이며, 스스로의 내부에 갇혀 고립되고 즉물화되는 주체들이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는 모조-웃음들이 아닐까.
의사(疑似)-이미지
조창규 시인의 ‘모카자바’는 옛 자바 섬에서 네덜란드 사람들이 뜨거운 커피에 초콜릿 시럽이나 코코아를 섞어 만든 커피인데, 시인은 그것을 ‘상술’이라 말한다. 시인이 간파한 것처럼, 모카자바가 일종의 상술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당시 세계 최고의 무역대국인 네덜란드 사람들이 초콜릿을 즐겨 먹었고, 그 먼 인도네시아에서도 초콜릿은 고향을 향수(鄕愁)하게 만드는 감각-기억의 확실한 매개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카자바를 마시며 양파를 곁들인 ‘홀란즈 니브’(청어요리)의 독특한 냄새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모카자바’는 뛰어난 축지술이자 상실된 매혹이며 상업 자본주의가 집요하게 만들어낸 의사(疑似)-이미지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네덜란드의 상술로 태어난 모카자바
초콜릿 향수(香水)를 마신다
세계지도는 띠지같이 커피벨트를 두르고 있다
계절의 밀당으로 사과가 달다
빠른 추석은 시럽을 넣지 않은 떫은 커피
과목은 살충제로 면역력을 키운다
아이스커피와 핫 커피를 고민하는 시기
날씨와 썸타는 며칠은 여벌의 온기가 필요해
온갖 후각을 배합한 한 병의 향수
좋아하는 계절만 사귀고 싶은데
서로 로스팅 주도권을 놓지 않는 조석(朝夕) 일교차
밤에 과수원을 깨우는 철조망엔 카페인이 흐른다
예멘 국기에서 검정을 빼면 인도네시아 국기가 된다
골고루 뒤섞인 정체성은 꽤 매력 있고
세계지도로 감싼 사과는 알찬 지구본이다
— 조창규, 「블렌딩 간절기」 전문
시인은 모카자바의 달고 쌉싸름한 맛에 집중하다가, 문득 계절이 뒤죽박죽 엉켜있는 ‘간절기’를 생각한다. ‘계절의 밀당’이라는 다소 낭만적이고 중의적인 시간들이지만, 거기에는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한 ‘못’이 날카롭게 박혀 있다. “시럽을 넣지 않은 떫은” 커피 같은 ‘빠른 추석’에 사과가 달콤한 이유는 살충제로 면역력을 키웠기 때문. “아이스커피와 핫 커피를 고민하는 시기”도 마찬가지다. “날씨와 썸타는 며칠은 여벌의 온기가” 반드시 필요하며, 이미 우리 자본주의는 이에 대한 생활의 방식과 문화의 형식을 만든다. 마치 “온갖 후각을 배합한 한 병의 향수”처럼 애초의 이미지-원형은 변용되고, 우리는 그것에 길들여진다. ‘맛’은 이미 결정된 채 우리 몸의 감각을 지배하며, 언제든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계열화’(배제를 포함한다)될 뿐이다.
그런 면에서 ‘간절기’는 세계 혹은 삶의 방식들이 어떻게 자본주의로 수용되고 로스팅되는가를 보여주는 징후가 아닐까. 무엇보다도 정체성-뿌리의 상실이라는 기묘한 혼재와 가짜-이미지들(시뮬라크르가 아니다)이 세계/삶을 전도시키는 위악의 거침없음을 보여준다. “세계지도는 띠지같이 커피벨트를 두르고 있다”는 문장을 보라. 맛의 고유 감각이 배제된 채 커피밸트로 단일화되는 소비 현상 혹은 “훔쳐보는 카톡 프로필, 선교사, 63도 고량주가 혼혈의 얼굴로 섞여 있는 / 외국인도 내국인이 되는 / 빈티지한 집들이 풍경의 가구가 되는 곳 / 굴다리의 사랑 낙서들로 여권 마지막 장을 채운다”(「연희동 프로필」)는 가공된 이미지들이 우리를 조작하지 않는가.
때문에 시인은 “좋아하는 계절만 사귀고 싶”지만 그러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시인은 이 표정 없는 혹은 박제된 ‘맛’의 불가해한 현혹을 거부하는 것. “서로 로스팅 주도권을 놓지 않는 조석(朝夕) 일교차”에 살충제에 절여진 과목은, 우리 몸에 비유하자면 밤낮으로 차량용 냉각수를 마시는 것과 유사하다. “예멘 국기에서 검정을 빼면 인도네시아 국기가” 되는데, 이 “골고루 뒤섞인 정체성”은 도대체 누구에 의한 것이며, 또한 무엇을 감추고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