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의 시창작 노트 part.3_ 제2장 환상-시
일인칭의 언어 혹은 발화의 물질성 (4)
타자 속의 언어-극장
정확히 말해, 홍지호 시인의 언어들은 이미지-원형으로 끊임없이 돌아간다. 이것은 단순히 심리적인 회귀로 말해서는 안 되는데, 그는 내면의 언어-극장에서 심장에 각인된 원초적인 ‘기억’을 불러내며 자본주의의 위악에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원초적인 기억’이란 타자-속-에서의 주체에 대한 발견이며, 마치 어머니와 탯줄로 이어진 태아처럼 대상과 자아가 서로 동일한 감각으로(유비가 아니다) 상관하고 있다는 보다 적극적인 투명성이다. 이것이 전혀 위계를 가지지 않는 한, 자본주의적 위악은 그 절대성 속에서 스스로 균열한다. 그가 일관성 있게, ‘나무’를 매개로 하여 현재에서 과거로, 또한 현실에서 꿈(환상)으로 이동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불을 보면서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타고 있는 것과 태우고 있는 것
타면서 날아가 버리는 것
혹은 타고 남은 것
불꽃은 간절해보였다 대신 울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정작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검은 연기
어쩔 수 없어 보였다
(중략)
아무도 울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데
울지 않는 동생이 있었다
불이 꺼지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있었다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나는 타고 남은 것에 대해 쓰고 싶었던 것 같다
— 홍지호, 「캠프화이어」 부분
“불꽃은 간절해보였다 대신 울어주는 것처럼 보였다”라는 문장으로 미루어, 이 시는 「거목」의 연장선에 있다. 「거목」이 할머니의 죽음을 ‘당나무’라는 매개를 통해 불러내고 있다면, 「캠프화이어」는 “정작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검은 연기 / 어쩔 수 없어 보였다 // 우리는 불꽃처럼 간절해보였지만 /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 어쩔 수 없어 보였다”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화장’(火葬)을 통해 죽음의 동공 곧, 치열한 자기응시를 본다는 것이다. 이때 ‘죽음의 동공’이란, 주체가 소멸되는 내재적 과정이 아니라 철저히 타자화된, 다시 말해 그것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자신의 심장에 기입하는 타자들의 시간을 말한다.
첫 구절에서 시인은 “우리가 모여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며 반문한다. 왜일까. 사람들의 애도와 추모로 가득한 마지막 영결이, 단지 흩어지기 위한 절차일 뿐이라고 여기는 것일까. 두꺼운 유리창문 바깥에서 시인은 자신만의 침묵에 갇힌 채, 할머니의 또 다른 죽음—육체의 소멸—을 본다. 대신 울어주는 것처럼 완강하게 타오르는 불꽃은 그로 하여금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타고 있는 것과 태우고 있는 것 / 타면서 날아가 버리는 것 / 혹은 타고 남은 것”이 그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 말이다. 죽음은 결코 반복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 경험의 완전한 바깥이자 폭력이다(사르트르). 그러나 이 문장들은 죽음에 단 한 발도 접근하지 못한다. 시인은 “아무도 울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데 / 울지 않는 동생”을 보면서 그것을 직감한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집중해야 할 것이 바로 “타고 남은 것”임을 깨닫는다. 그것은 자신의 심장에 각인된 숙명, 곧 죽음의 은밀한 동공(지켜봄)이다.
할머니가 당나무와의 완전한 일자를 꿈꾸었던 것처럼, 그도 할머니와의 일체를 갈망한다. 특히 죽음의 내면화를 통한 주체의 타자화는 삶에 대한 끝없는 긍정을 이끌어낸다. 따라서 이미지-원형으로의 되돌아감은 시적 의장이 아닌, 방법적 본질이며 언어가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의 최대치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자본주의적 위악은 설 자리를 잃는다. 왜냐하면, 죽음‘조차’ 일정하게 규격화시켜버린 자본주의는 일자들의 충만한 교감 속에서 더 이상 분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푼크툼의 낯선 배열
배진우의 언어만큼 ‘푼크툼’(punctum, 바르트)이 작동하는 언어가 있을까. 길면서도 빠르고, 빠르다가도 느긋하며, 이미지 사이의 뚜렷한 연관성을 찾아볼 수 없는, 이 종잡을 수 없는 언어들의 배치는 발화의 물질성을 시적으로 편곡한 충분한 예가 아닐까. 그는 ‘사이’에 집중함으로써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간극을 극명하게 돌출시키고 있으며, 동시에 이 독특한 미적 ‘공백’을 시의 행간으로 분절시키고 있다. 문장의 속도는 시인의 감정 상태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단어와 단어, 혹은 문장과 문장 ‘사이’의 언어적 전의(轉義)나 왜곡, 위반에 따라 결정된다. 시인이 아니라 단어와 문장 스스로가 결정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시인이 포착한 대상의 이미지는, 어두운 상자 속에서 작은 구멍을 뚫어놓고 피사체를 투사한 초기의 카메라옵스큐라처럼, 그 상이 뒤집어졌다는 의미에서 텍스트의 모호함과 재현의 불가능성을 역설하고 있지 않는가. 오로지 독자의 경험-지평만이 요구된다는 측면에서 이 푼크툼은 (사진에서뿐만 아니라) 작품-이해의 불가해한 지점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시인이 “내 안에서 가장 강한 것들을 속삭인다 / 여름과 여름 사이에 / 침묵과 여백 사이에 / 난간에 앉은 사람과 누워있는 사람 사이에 / 물의 주름 하지만 / 멈추지 못했던 것들 사이에”(「싸움」)라고 썼을 때, ‘여름과 여름’, ‘침묵과 여백’, ‘난간에 앉은 사람과 누워 있는 사람’, ‘물의 주름과 멈추지 못했던 것들’의 대비는 도대체 어떤 기준이 작용한 것일까. “내 안에서 가장 강한 것들이 속삭인다”라는 문장을 미루어보면 ‘여름’에서 ‘멈추지 못했던 것들’까지는 시인의 몸 위에 기입된 이미지들의 흔적으로, 즉 신체가 ‘능동적으로’ 기입한 대상의 나타남으로 ‘가장 강한’이라는 기준에 따라 서로 동등한 밀도를 가진다: 여름의 돌연한 침묵과 그것이 감싸 안은 여름의 또 다른 여백, 시인의 시선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정태적(情態的) 상황들, 그리고 그 ‘멈춤’을 한 층 더 상승시킨 ‘물’의 이미지는 시인의 언어에서는 다른 종이에 찍힌 동일한 것들의 판본-이미지다.
내 안에서 가장 강한 것들을 속삭인다
여름과 여름 사이에
침묵과 여백 사이에
난간에 앉은 사람과 누워있는 사람 사이에
물의 주름 하지만
멈추지 못했던 것들 사이에
숲의 이름은
숲을 숲이라 믿었던 이가 만들었으면 좋겠다
숲의 바닥에는 유리가 버려져 있다
있던 물건이 바닥으로 향하는 일에는 오해가 없다
오래 훔쳐본 유리일수록 빨리 녹는다 오래 지켜본 눈일수록
쉽게 잠긴다
내 상상은 멈추어서 비로소 시작한다
유리 위에 유리가 날카롭게 포개어진다
종이 끝에 창문을 그리는 버릇이 있었다
나도 나를 만든 적은 없었지만
여름에서 여름을 여름에게 여름을
숲도 길을 품은 적이 있다는 걸
먼 곳에서 번지는 병처럼 곧 슬퍼할 부정의 순서처럼
숲의 이름은 그렇게 만들어질 것만 같아서
규칙 없는 놀이를 하던 아이들에게 더운 그림자를 던져주고
내일도 숲을 고민한다
이야기가 없기에 단단한 것들을 알고 있다
숲이 멈추고 숲을 걸으면
나도 나를 이용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 배진우, 「싸움」 전문
지금 시인은 ‘숲’으로 명명(혹은 상상)되는 어떤 곳에 있다. 우리가 ‘어떤 곳’이라 말하는 까닭은 단순하다. 시인이 “숲의 이름은 / 숲을 숲이라 믿었던 이가 만들었으면 좋겠다”라고 쓴 것처럼, 대상은 주관 속에 감춰지고, 대상의 형상은 오직 그것에 대한 명명자의 ‘믿음’이라는 정서적 반응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이곳이 ‘숲’이라는 확증은 없으며, 때에 따라서는 숲이 아닌 다른 곳이 될 수 있다. 또한 명명자의 심리적 투사인 ‘숲’은 대상 스스로의 나타남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이 여름과 침묵, 이념, 난간에 기댄 자와 누운 자, 그리고 물의 주름과 멈추지 않는 것들이 동등한 밀도를 가질 수 있는 이유이며, 배진우 시에서 ‘푼크툼’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명명하는 자의 주관에 따라 좌우되는 이 모호성은 독자의 시선에도 그대로 작용하며, 대상의 가시성은 그 가시성 속에서 자체의 인과를 잃어버리게 만든다. 바닥에 버려진 ‘유리’가 빨리 녹는다는 문장은 관습적으로는 ‘유리’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 아니겠는가. 당연하겠지만, 바로 이 부분이 시인의 시선(상상)이 향한 곳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시선/상상’이 어떤 내러티브의 연쇄에서 발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먼 곳에서 번지는 병처럼 곧 슬퍼할 부정의 순서처럼 / 숲의 이름은 그렇게 만들어질 것만 같”다는 것이다. 내러티브의 부정, 이것은 “이야기가 없기에 단단한 것들”이며 시의 일반적인 특징이겠지만,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상을 그 주변으로부터 뽑아낸다/이끌어낸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의 이미지-언어에는 통상적인 리얼리티가 존재하지 않으며, 대상에 대한 끝없는 ‘인용’과 그것의 변용만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특히 「소녀의 소년」가 그러한데, 그는 “작게 웃는 당신 감은 눈을 일부 인용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라는 문장을 반복하면서 이러한 효과를 극대화한다(「도모」의 ‘생각했다’라는 서술어도 이와 유사하다). 이 문장들은 이어지는 다른 문장들과의 대비를 통해 의미의 감각을 매번 다르게 펼쳐놓는다. 곧 ‘인용하고 싶은 바람’의 술어들을 편집하면서 만든 이미지-언어의 일회적 나타남을 몽타주 형식으로 직조하는 것: 시인은 이것을 ‘규칙 없는 놀이’로 말한다(「도모」에서는 공포의 무한 증식으로 이어진다).
다시 시로 돌아가자. ‘숲’과 ‘유리’는 표면상 부드러운 것과 날카로운 것의 대립이지만, ‘크기’라는 공간적 관점에서 봤을 때는 마음과 불안의 유비에 해당한다. 물론 이것은 “종이 끝에 창문을 그리는 버릇이 있었다”라고 쓰면서 대상에게 자신의 불안을 투영하는 행동의 연장이기도 하다. “숲도 길을 품은 적이 있”지만, “나도 나를 만든 적은 없”다는 문장의 대비가 이러한 사태를 함축하는바, 우리는 이 간극에서 시인의 맹렬한 자기 부정을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