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벌레-소년 혹은 죽음의 기표들

금요일의 시창작 노트 part.3_ 제2장 환상-시

by 박성현


벌레-소년 혹은 죽음의 기표들




특이하게도 카프카의 『변신』은 주인공이 벌레로 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자고 일어나니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고딕소설이나 빅토리아 시대의 작품들━예를 들면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 등━은 공간 이동이나 무의식적 욕망이라는 분명한 이유로 육체의 변형이 이뤄지지만, 카프카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레고르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는 벌레가 되어버린다. 갑작스럽게 해고를 통보받은 노동자처럼 말이다. 이 당혹스러움 앞에서 ‘왜’라든가, 혹은 ‘무엇 때문에’와 같은 질문은 무의미하다. 그레고르는 ‘그’가 아닌 ‘그것’이 되었으며, ‘벌레’라는 이물(異物)은 그를 남김없이 붕괴시켜 버렸다.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미 ‘이야기’는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형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이름은 물론이고 인간의 모든 언어를 잃어버림과 동시에 가족과 사회에서도 제외된다.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고통은 자신의 몸이 변형되었다는 것이 아닌 ‘언어’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소통할 수 없음으로 해서 그는 자신을 증명할 수 없었고, 상황의 명료함으로 인해 그는 가족과 사회에서 제외되었다. 그것은 현대사회에 만연한 일상적인 편집증 혹은 불안감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레고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조용히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주체의 내면에 형성된 무의식적 욕망이 육체의 변형과 관련된다는 점이다. 환상은 주체가 세계에 반응하고 작용하는 방식으로, 주체의 욕망과 길항관계를 형성한다. 때문에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했다는 것은, 그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다 하더라도, 그의 무의식이 작동한 결과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레고르는 벌레-되기를 욕망하며, 자본주의 시스템에 저항했던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환상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현대 사회의 환상은 이 같은 충격 체험에서 출발한다. 점점 삶이 더 비현실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느낌은 이젠 현대인의 자연스러운 감정이 되어버렸다. 곳곳에 노출된 갑작스러운 신체적 강탈(우리는 매 시간 자동차나 지하철 사고로 죽어가는 사람들이나 건물 붕괴로 뜻하지 않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기사를 접한다)은 물론이고, 뉴스나 광고 등에서 촉발되는 언어의 ‘제로 디그리(zero degree)’ 혹은 전경화에 기인한 ‘기호론적 과잉(semiotic excess)’ 등의 현상은 현대인들의 정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환상은 촉발되지만, 우리는 그것이 환상임을 지각하지 못한다. 게임에 몰입함으로써 경험하는 현실과 환상의 전이처럼 그것은 중심 없는 미로의 풍경들이며,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에덴의 다른 이름이다.



쓸쓸한 벌레

가 머리카락을 타고 기어내려


콧구멍 속으로 파고들어간다. 쓸쓸함이

정신없이 더듬이를 흔들며, 목구멍과 3

ㅔㅃ1 지나, 허파 속까지 더듬어

들어간다. 어딘가 파묻히고 싶은가보다. 되돌아 갈

수도 더 나아갈 수도 없는 곳에 쿡

처박혀 이 모든 게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중얼거리고 싶은가보다. 고단하게 잠

들어 깨어나고 싶지 않을 지도

모른다. 쓸쓸한 벌레가

짧고 까만 수많은 다리들을 바지런히

움직여, 마치 재봉틀로 상처를 기워내듯

얼기설기 대충 마무리한 채 서둘러

도망가고 싶

은가보다. 혜성처럼 떨어질 한마디 말이 무서웠

나? 수많은 공룡과 커다란 물고기들이 그날 이후


멸종해버렸으니...


벌레는 바지런히 발을 움직여, 더듬이를 흔들며 숨

는다. 어둑한 기억의 혈관을 지나, 심장 어느 귀퉁이로... 뭔가가

기어 내려가는 것을 느낀다. 점점 더 좁고 어둡고, 막막한


구멍


...언젠가 다시

깨어난다면 혹시나

그곳은 다른 세상일지도 몰라


다 잊고

다시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바지런히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 잊고... 그저 살겠다고 또

상처주고 상처받으며... 쓸쓸한

검은 벌레가


기어

내려간다. 끝, 옴짝달싹할 수 없는, 조용하고 치명적인


으로...

— 황강록, 「쓸쓸한 벌레」 전문



벌레가 있다. 그것은 시인의 머리카락을 타고 기어 내려가 콧구멍 속으로 파고 들어가고, 목구멍과 기도, 허파 속까지 잠입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어딘가 파묻히고 싶”기 때문이다. “되돌아 갈 / 수도 더 나아갈 수도 없는 곳에 쿡 / 처박혀 이 모든 게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 중얼거리고”, “고단하게 잠 / 들어 깨어나고 싶”은 것. 이 같은 벌레의 행동과 시인의 욕망은 정확히 일치한다. 시인은 벌레를 통해 자신을 표상하며 일정한 행동의 연결고리━‘파고 들어간다’, ‘처박히다’, ‘중얼거리다’, ‘깨어나지 않는다’━를 만들어낸다.


벌레로 표상되는 행동의 연쇄는 최종적으로 존재의 없음, 곧 ‘죽음’을 향한다. “쓸쓸한 벌레가 / 짧고 까만 수많은 다리들을 바지런히 / 움직여, 마치 재봉틀로 상처를 기워내듯 / 얼기설기 대충 마무리한 채 서둘러 / 도망가고 싶 / 은가보다”고 말할 때, 그리고 “쓸쓸한 / 검은 벌레가 // 기어 / 내려간다. 끝, 옴짝달싹할 수 없는, 조용하고 치명적인 / 곳 // 으로...”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 죽음의 필연성을 확인할 수 있다. 벌레라는 이 도저한 ‘죽음’ 앞에서 삶의 모든 것은 공허하다. 산다는 것 혹은 ‘사랑’조차도 한낱 상처일 뿐이다. 이 매혹적이고 자명한 공허 혹은 절망 앞에서 시인은 거대한 공포와 마주한다. 확실히 벌레는 스스로를 파괴할 수밖에 없는, 그리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의 숙명이다.


그런데 그 죽음은 육체의 없음(無)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호와 의미의 소멸에까지 확장된다. 문제는 그 죽음의 은유들이 바르트나 데리다가 말했던 작가의 죽음 내지 의미의 해체와는 그다지 연계성이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시인은 죽음의 단순성을 극단화해, 주체(시인)와 표상(벌레)의 단독적 일치를 추구한다. 시인은 벌레를 자신과 동일한 존재로 간주하지만, 욕망의 대리물이라든지 무의식의 표상으로써가 아닌, 시인 자신과의 등가물로 간주하는 것. 이 같은 동일화는 한 주체 안에 내제된 수많은 분열적 주체들(파생 주체)로 분산시키지 않고 텍스트 전체를 거대한 은유로 구상한다.


이는 언어적 다의성, 혹은 애매성을 기본 전략으로 구사하는 현대시와는 상반되는 점인데, 시인은 그가 구획한 대상과의 단순한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의미의 직접성을 유발한다. 벌레를 시인으로 대치해도 큰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대신 시인은 시의 일반 어법을 “얼기설기 대충 마무리한 채 서둘러 / 도망가고 싶 / 은가보다. 혜성처럼 떨어질 한마디 말이 무서웠 / 나?” 등과 같이 뒤틀어버림으로써, 의미 혹은 사유를 정지시킨다. 어법이라는 자동 기술의 멈춤은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유발하는 방법론적 기재임은 물론이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벌레가 시인에 대해 자기 파괴적인 공격성을 띤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벌레’들의 공격을 (실재하지는 않지만) 경험적으로 상상한다. 언제든지 벌레가 내 몸을 갉아먹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것이다. 때문에 벌레의 공격이 단순히 망상 혹은 편집증으로 치부할 수 없는바, 시인의 불가해한 벌레-경험은, 그것이 시인의 구체적 삶 속에서 ‘제시’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시인의 현실이다. 비현실적인 것이 오히려 실재가 되는 것이다. 시인의 언어 속에서 환상은 실재다. 우리가 경험하는 한 리얼리티의 절대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세계의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언어로 환원되는 한 그 리얼리티는 보장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환상은 철저히 이중 기표를 가지게 된다. 환상 그 자체가 이미 현실과의 연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첫째이며, 동시에 여기서 파생된 환상이 또 다른 환상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진다는 것이 둘째다. 환상은 관습화된 언어를 깨뜨리고, 새로운 문맥 속에 둠으로써 그것들의 의미론적 영역을 재구성한다는 점은 명백하다.


환상의 핵심 기재 중의 하나는 공포다. 환상이 불러일으키는 감각은, 고딕 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기괴하고 어둡다. 환상 속에서 실재는 재현(mimesis)이 아닌, 재현의 변형 혹은 이물(異物)이 된다. 환상이 정교해지면 질수록, 실재에 대한 이중, 삼중의 변형이 이뤄지며 더욱 그로테스크해지는 것이다.

keyword
이전 27화일인칭의 언어 혹은 발화의 물질성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