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써도 괜찮아, 100살까지 글쓰기 프로젝트 11화입니다.
그날은 일반적이지 않게 모든 게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아버지를 감싸고 있는 공기는 반쯤 넋이 나간 채,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아버지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 공기는 의미가 빠져나간 대도시의 외로움이 고통을 잔뜩 움켜쥔 채, 현실을 육중하게 대면하고 있는 상황처럼 느껴졌다. 그곳에는 어떠한 새로운 유혹의 향기가 머물 수도 그 밤을 감당할 무엇인가가 더 보태어지기도 힘들어 보였다. 다만, 어떤 존재는 침묵하는 공기 속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가기를 열망하는 듯 보였다.
속이 텅 비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속을 알 수는 없었지만, 단조로움 속의 삶의 기쁨도, 풍요 속의 너그러움도, 행복에 겨워 눈물 나게 하는 것들도 존재할 수 없었고, 오직 근엄한 침묵만이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금욕적인 절망감마저 느껴졌다.
아버지를 둘러싸고 있는 몹시 부조화스럽고 복합적인, 표현하기 아주 애매하고 간략하게 단정 지을 수 없는 공기의 나이테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방식으로 아버지 주위에 텅 빈 공백을 만들어 놓고 있었는데, 우리와 아버지의 등 사이에 가로놓인 이 장벽들은 결코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었다.
평소의 그날과는 다르게 뭔가가 빠져있는 결함에 가까웠다. 매월 이십오 일에 마주했던, 아버지의 환한 미소와 당당하고 곧은 어깨는 어디론가 소멸되어 버렸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음이 분명한데 그 실체가 또렷하지는 않으나, 경계심만은 지나치리만치 날카로운 느낌이었다.
아버지의 환희에 찬 표정을 읽어버린 것일까, 아님 아버지의 손이 너무 자주 왼쪽 가슴께로 향했던 것일까.
아주 오래전 몹시 추웠던 어느 해 연말, 이십 하고도 오일의 어느 날, 수많은 인파에 갇힌 퇴근길 지옥철 안에서 아버지의 월급봉투는 사라져 버렸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최상도 최악도 모두 참아내야 한다지만, 얼마나 많은 저녁들과 얼마나 많은 아침들이 녹아있는 값어치인가에 생각이 이르면, 가슴과 가슴을 맞대며 짓누르는 이 형체 없는 공허는 내가 수긍할만한 무게는 아니었다.
나는 '존재에서 비존재'로 이 상황을 만들어버린 지옥철 속의 이 세상에서 가장 못된 인간에게 투우장에서 살아남은 황소가 오직 그에게 상처를 입혔던 투우사의 리본 달린 창들에 대한 기억만 간직하듯이 이 세상에서 쓰일 수 있는 온갖 나쁜 말들과 내가 찾아낼 수 있는 고통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끌어모아서 그 못된 인간에게 마음속으로 저주를 퍼부어 댔다. 그 어느 곳에서도 이토록 강력하게 솟아날 수 없을 정도로 경멸당할 인간에게 불행의 낙인을 추가로 찍어주었다.
눈이 녹아 얼어붙은 차가운 12월의 시장통 끝자락 야채가게에서 김장용 떨이 배추를 짊어지고, 앞서 걷던 아버지의 등 위로 흩날리던 하얀 눈발을 잊지 못한다. 한 달 살림살이와, 자식들의 학비와, 아무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하고, 물러날 곳 없이 막바지에 내몰린 절망까지를 품고 걷던, 아버지의 등위로 하염없이 날리던 흰 눈발을 잊을 수가 없다.
세월이 한 참 흐른 지금,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은 그 겨울밤의 차가운 공기와 눈 속을 걸어가던 아버지의 등이다. 그 많은 희망들 위에 시간이 멈추어 있다.
그날은, 이처럼 솔직한 말을 입밖에 낼 수가 없었다.
"아버지, 그때 정말 힘드셨지요?"
이제야,
그 시절의 아버지에게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