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15. 수
“잘 주무셨어요?”
기용이의 목소리가 꾀꼬리다.
먼저 씻게 했고, 먼저 자라고 이르고는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았었다.
유튜브를 뒤지다 고른 숨소리를 듣고야 잠을 청했는데.
같이 자준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몰라 일부러 자는 척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
화장품 냄새라서
꺼렸던 고수
베트남 음식에는 꼭
있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고수를 고수하자
여행은 많이 다녀본
사람이 진정한 고수
열심히 따라다니는 고주
고수가 되어야지
2층 너른 식당.
와글와글 쏼라쏼라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말.
단체 손님들이 일정 때문에 빠른 식사를 하는 모양이다.
한쪽 구석에 다소곳이 앉아 조심조심 식사하는 분들은 가족 단위 한국인.
딱 봐도 알겠다.
준홍이는 손을 흔들더니 홀 매니저쯤 돼 보이는 정장의 여인을 부른다.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이고는 “에그 프라이”라고 외친다.
고개를 굽신거리며 반숙 프라이 네 개를 가져온다.
앞으로 이렇게 하면 모닝 프라이를 먹을 수 있다고,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정보를 실습으로 보여 준다.
쌀국수는 기본, 용과와 두리안까지.
특히 한식 코너의 김치를 보니 눈이 뒤집힌다.
프런트에서 기다리는데 투가 오지 않는다.
근처의 싼 방을 구했다고는 했는데.
머리에 물기도 말리지 않고 헐레벌떡 뛰어오는 투.
숙소의 다른 나라 여행자들과 한 잔 더하고 잠을 잤는데 늦잠을 잤다나.
진짜 여행은 투가 하고 있다.
안개 낀 바다, 배들이 쭉 늘어선 부두, 갯냄새나는 탁한 물색.
50명도 넘게 타는 배에 달랑 다섯 명이 탄다.
선장, 사모님, 아들 그리고 정체불명의 사진기사까지 아홉 명.
휴대폰으로도 아쉬운 것이 없는 판에 렌즈가 망치만 한 사진기도 아니고, 전문가 같지도 않은 촌 아줌마가 사진을 찍는다고?
하여간 배는 부두를 떠난다.
날씨가 좋으면 숨이 막힐 광경을 보게 될 텐데, 하늘을 보며 원망하는 기승이의 속은 시커먼 숯덩이가 되고 있다.
어제 케이블카를 타고 갔던 언덕 넘어 쯤으로 생각했는데, 배는 안개에 묻혀 먼바다로 가고 있다.
2층에 올라 멀어지는 부두, 고기 잡는 배, 자그마한 섬에 지어진 궁전 같은 호텔을 구경하는데 기어이 비가 온다.
맥주부터 돌리자.
오징어 안주에 시원한 캔 맥주.
손 씻는 물수건은 왜 나오는 건데.
사진 찍는 아주머니는 서빙도 하네.
하여간 지나친 환대가 부담스럽다.
비는 그쳤고 안개가 옅어졌다.
불쑥불쑥 나타나는 섬들, 그 속으로 배가 빨려 들어간다.
사연이 있는 바위나 섬에서는 어김없이 단체 사진을 찍으라며 사진기를 들이대는 아주머니 때문에 성가시다.
그래 못 이기는 척 몇 번 폼이나 잡아주자.
정신 들어보니 이순신의 배에 포위된 일본군의 심정이랄까?
“下(내려온다) 롱(龍)
중국이 침략하자 하늘에서 용들이 내려와 입에서 구슬과 보석을 내뿜었는데 그것이 섬이 되었다.”는 전설 속의 1969개의 섬이 겹겹이 둘러싼 호수 같은 바다.
날씨가 좋았다면 파란 하늘이 바다에 비쳐 하나 되면 숨이 멎었을지도 모르겠다.
달력에 나오는 동양화처럼 구름을 삐지고 나온 섬들의 모습도 충분히 가슴을 뛰게 한다.
여기저기 큰 배들이 모인다.
배에서 일출과 일몰을 보는 일정이란다.
그것도 낭만적인 경험일 것 같다.
돈에 나온다는 향초 바위 앞에서 사진을 찍고, 바다를 빙 둘러보다 배는 해안에 정착하고 동굴탐사에 나선다.
좁은 계단을 오르면서 자그마한 구멍이 보이는 굴이 별 거겠느냐는 생각이 정말 큰 주먹을 한 대 맞았다.
이건 공설운동장이다.
기묘한 형상을 한 석순 종유석 기둥 벽들이 보는 사람의 맘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동굴을 나와 선전에 많이 나온다는 해안으로 가는 길.
투는 바위에 사람이 걸터앉아 있는 듯한 바위를 가리킨다.
사진을 찍어 톡방에 올리고 “중훈아 너무 위험해”라고 올렸더니 익성이는 어미 곰이 새끼 곰을 위험에서 구하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보니 영락없다.
아이들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아빠라 그렇게도 보이나 보다.
구명조끼를 입고 곤돌라에 오른다.
깡마른 젊은이는 배 하나 정도 들어가는 바위틈으로 노를 저어 간다.
순간 다른 세상으로 옮겨온 듯 조용해진다.
나무 위를 옮겨 뛰는 원숭이들의 천국, 원숭이 섬.
기승이는 후원해 준 친구들에게 한 말씀해달라고 동영상을 찍는다.
“아무래도 한 달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으니, 후원금을 더 걷어서 보내라.”라고 주책없는 늙은이는 속없는 미운 소리만 한다.
직접 노를 저어 들어온 서양 젊은이들은 물속으로 텀벙 들어가기도 한다.
어느 회사에서 MT를 왔는지 무슨 구령인가를 외치는 것도 보인다.
오래 있으면 밖의 세상은 수천 년 지나버렸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는 묘한 공간이다.
보트로 옮겨 탄다.
키를 잡은 녀석이 장난기가 많아 보인다.
처음부터 속도를 높여가며 이리저리 방향을 튼다.
섬에 부딪칠 것 같은데도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간이 콩알만 해져 배의 난간을 잡고 부들부들 떠는데 준홍이는 더 하란다.
이 짓을 비싼 돈 주고 왜 하는지 모르겠다.
무서움이 익숙해질 만하니 고 맹랑한 녀석이 갑자기 노래를 하겠단다.
막무가내로 박수를 치란다.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이이면....” 서툰 발음이지만 자신감은 충만이다.
거기다 “짜라 짜라 잔짜”, “새야 새야 새야”는 또 어디서 배운 것이여.
하여튼 준홍이 지갑만 가벼워진다.
베트남을 너무 좋아해 자주 들렀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소련 우주비행사 티토프의 동상이 있는 티토프 섬.
작은 모래 해변이지만 해수욕장도 있다.
따뜻한 모래 위에 몸을 부리고 일광욕을 즐기는 상팔자 덩치 큰 개도 있다.
전망대로 오르는 구불구불 긴 계단.
중간의 정자 앞에, 여기까지가 딱 좋다는 다리가 흔들리는 노인들 몇.
언제부턴지 한국말들만 들린다.
등산을 즐기는 민족이 맞다.
사진 속에서만 보았던 그 풍경.
안 왔으면 어쨌을 뻔했는가.
옹기종기 머리를 맞댄 섬들이 “잘 오셨습니다. 36년 힘드셨죠? 이제는 좀 쉬세요.”라며 막걸리잔을 권하는 것 같다.
큰 소리가 들린다.
왜 밥을 안 주느냐고 떼쓰는 할아버지.
한국시간으로 벌써 세시가 넘었다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평생 속앓이하셨을 할머니.
곤란한 가이드의 표정.
뭐 하러 이 먼 데까지 오셨소.
집에서 따뜻한 밥 드시지.
매를 번다, 벌어.
배가 출출하다. 좀 늦은 점심이다.
배에 오르니 입이 떡 벌어진다.
산처럼 쌓인 다금바리 회, 팔뚝만 한 가재, 새우, 게, 굴, 오징어무침, 각종 전, 튀김.
상다리가 부러진다, 그것도 독상으로.
기승이가 가져온 소주 4병으로는 택도 없다.
맥주가 줄을 서고, 찜, 매운탕이 따라나선다.
팔 소매를 걷어붙이고 새우는 왜 까느냐고, 카메라 아줌마가.
정신이 아리까리 해질 때쯤 부두가 보인다.
하루 내내 우리만 태우고 돌아온 배 주인이 좀 딱하다.
코로나로 관광객이 많이 줄어 여기도 어려워졌단다.
하늘만 쳐다볼 수 없으니 한 팀이라도 약속이 잡히면 나가야지.
고생하셨다고 인사를 하고 대합실로 나오는데, 앨범 4개를 들이미는 사진사 아줌마.
어느새 사진을 출력해서 개인별로 앨범에 넣었다.
100장이니 100달러를 내놓으란다.
순간 눈에서 불길이 확 솟는다.
나도 모르게, 그래서는 안 되는데.
“그냥 돌려줘 버려. 순 사기꾼 아니여. 누구를 봉으로 아나.”
준홍이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배에 있는 사람들이 다 나눈다면서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한다.
벌어진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이 사업가의 능력.
하여간 사진은 잘 나왔네.
힘드니 여유 있는 놈들 신세 좀 지는 것도.
고개는 끄떡이면서도 얼굴이 후끈 붉어진다.
뒷골목 구경에 나선다.
생과일 집에서 기어이 패션후루츠 주스를 먹는다.
준홍이가 왜 그렇게 목을 맷는 지 알겠다.
쌉스름 달착지근, 오독오독 씹히는 씨.
처음 마셔본 맛이지만 상큼하고 묵직하고 고급스럽다.
얼마나 더 커지려나?
빈틈에는 하늘로 솟는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넓은 광장에 무대가 있고, 주변으로는 먹거리 포장마차가 즐비한 공원.
밤에만 문을 여는지 준비가 바쁘다.
무슨 공연을 해야 어울리는지 기승이 머리는 빠르게 돌아간다.
차는 좀 이른 마사지를 위해 달린다, 어제와는 다른 손을 찾아서.
좀 외진 곳이다.
덩치가 우람한 아짐도 보인다.
너무 손을 많이 탄 내 몸뚱이는 반응이 느리다.
살금살금 흉내만 내는 것 같아 잠이 온다.
오토바이에 오르면서 찢어진 외투 옆구리를 보여 주는 아가씨는 “나 돈 없어”하며 웃는다.
부지런히 집에 가서 식구들 밥 챙기세요.
주야장천 생선만 먹었으니 삼겹살도 먹어보잔다.
노릇노릇 구워지면서 나는 소리, 싱싱한 상추.
소주와 함께 넘어가는 기름진 남의 살.
가라앉은 술기운이 다시 오른다.
힘들게 운동하는 것도 아닌데 배는 이렇게 빨리 꺼지는지.
투가 작심했나 보다.
차가 해안가 나이트클럽 앞에 선다.
모래 위에 테이블을 놓고, 무대에서는 화려한 조명이 번개를 친다.
한 바퀴 돌아본 기승이는 엄지를 치켜세운다.
중앙 무대에는 조끼만 입은 머슴아가 묘한 동작으로 춤을 추더니, 테이블 쪽 조그만 무대 위로 늘씬한 여자 무희들이 올라간다.
에라 모르겠다.
들어가 앉자.
밖에서 모여 앉아 담배를 피우던 꼬맹이들이 우르르 달려든다.
술을 가져오고, 안주를 가져오고, 술까지 따른다.
잔이 비워지면 쏜살같이 달려와서.
제 잔에도 따르고 건배까지 하잔다, 돌아가면서.
웃기는 놈들이다.
아이까지 데려온 서양 부부는 결국 돌아가고.
준홍이의 몇 마디에 춤추는 녀석과 늘씬한 아가씨가 우리 테이블로 온다.
어차피 손님도 별로 없는데 출장 영업을 뛰어야지.
배를 울룩불룩하면서 끼를 부리는 녀석에게 준홍이는 완전 꽂혔다.
사진을 찍자는 말에 배에 힘을 주는 아가씨들.
이것이 뭔 호강이냐고.
피가 사정없이 전신을 뜨겁게 돈다, 내 머리가 돈다.
어제 그 편의점 앞.
맥주는 여전히 맛있다.
내일은 좀 힘든 일정이라고 기승이가 엄포를 놓는다.
높은 하늘 아래 호텔에서 불빛들이 밤을 지킨다.
쿵쾅거리는 음악 소리는 여전히 내 가슴을 때린다.
무대에 올라가서 신나게 한번 흔들어줄 걸 그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