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폭염이 가셨습니다. 9월 중순도 지난 20일에야 비로소 폭염이 떠났습니다. 나가보았더니 새깃유홍초가 피었습니다. 여름 끝자락에 피어 가을을 알리는 꽃입니다. 잎은 새의 깃털을 닮았고 꽃은 별을 닮았습니다. 지난밤 비에 젖은 잎사귀가 아침 햇살에 빛나고 별 모양의 꽃 안에서 흰 수술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릅니다. 맨살을 내놓은 팔이 추웠습니다. 눈은 꽃을 보고 팔은 기온을 느끼고 생각은 가을을 만나니 우리가 만나고 알아차리는 것들은 모두 일상에 있군요.
삶은 일상에서 이루어지고 만남 또한 그러합니다. 가을과 산과 인연을 노래한 시가 생각났습니다. 몇 날이고 마음에 두었던 지리산 시인, 박남준의 「가을, 지리산, 인연에 대하여 한 말씀」입니다.
아래는 시의 일부입니다.
바람은 춤추고 우주는 반짝인다
지금 여기 당신과 나
마주 앉아 눈동자에 눈부처를 새기는 것
비로소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인연은 그런 것이다
나무들이 초록의 몸속에서
붉고 노란 물레의 실을 이윽고 뽑아내는 것
뚜벅뚜벅 그 잎새들 내 안에 들어와
꾹꾹 손도장을 눌러주는 것이다
아니다 다 쓸데없는 말이다
한마디로 인연이란 만나는 일이다
기쁨과 고통,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물들어간다는 뜻이다
『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실천 문학사 2010
당신의 모든 것을 읽는 일, 그것은 사랑입니다.
바람이 춤추고 우주는 반짝입니다. 대기는 움직이고 그 움직임에 햇살마저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주 맑은 날인 듯합니다. 어느 맑은 날, 당신과 내가 마주 앉아 서로 눈부처를 새깁니다. 눈부처란 무엇일까요. 눈동자에 비치는 사람의 모습을 일러 눈부처라고 합니다. 눈부처를 새길 정도라면 아마도 한참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앉아서 미동도 하지 않는 사람을 보고 부처라고 하니까요. 그러므로 바라보는 이가 부처처럼 앉았거나 섰거나 움직이지 않았을 테지요.
이 시에서 당신과 나는 마주 앉아 서로를 바라보면서 눈동자에 눈부처를 새깁니다. 실제로 오래도록 마주 앉았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열었다는 활짝 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깊이 주의를 기울였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우주가 반짝인다는 것은 환희를 의미하니까요. 바람이 춤춘다는 것은 흔들림을 말하니까요. 새로운 존재와 마음을 여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안다는 것이니까요. 관계는 그렇게 시작합니다. 당신과 내가 서로를 마음에 담음으로써.
한번 튼 인연의 물길은 내 안에서 흐르고 당신 안에서 흐릅니다. 나는 당신을 바라보고 변화를 알아차립니다. 당신은 나를 바라보고 나를 읽어냅니다. 내 안에서 싹트고 자라나고 익어가고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눈빛을 통해 대화를 통해 몸짓을 통해 읽어나갑니다. 당신이 자신을 찾아온 다양한 사건을 통해 당신 안에 있는 가능성이 이윽고 성숙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은 나무들이 초록에서 도무지 있을 것 같지 않은 노란 잎새를 피워올리고 붉은 단풍을 뽑아 올리는 것 같습니다. 그 일을 지켜봄으로써 기다림으로써 알아차립니다.
사실 어려운 일이지요. 정말로 많은 일과 너무도 많은 사람이 내 곁을, 당신 곁을 스쳐가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눈부처를 새긴 우리는 서로 눈빛을 읽고 몸짓을 듣고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당신을 읽는 일은 텍스트를 읽는 일과 같아 여러 번 되풀이한 다음이라야 비로소 당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사건들은 당신의 각기 다른 측면을 보여주게 되니까요. 어디 나만 그럴까요. 당신 또한 내게서 동일한 것을 경험할 테지요. 환경과 만나 조건을 통해 펼쳐나가는 내 안의 여러 면모를, 그리하여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당신이 알아차리듯 나 또한 당신의 여러 면모를 보고 당신을 이해해 가는 것입니다.
당신의 기쁨을 고통을 보고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사랑입니다. 오직 사랑밖에 없습니다. 당신과 내가 만나 눈부처를 새긴 것은 이 사랑을 펼쳐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인연은 인과 연입니다. 원인이 있어 맺어진다는 것, 인연은 곧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이기도 하지요. 만들어진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서로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 삶의 근원은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