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으로 가는 문을 연 번역된 『채식주의자』
이강선 (성균관대학교 번역대학원)
그 소식을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들었다. 10월10일 목요일 늦은 저녁이었다. 처음에는 가짜 뉴스인 줄 알았다. 그만큼 느닷없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이내 여기저기서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고 스웨덴 한림위원회 소식을 청취하던 지인이 그 소식이 진짜라고 전해주었다. 곧 물밀듯이 사방에서 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순간 8년 전에 썼던 논문이 떠올랐다. 그 논문은 한강의 책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버러 스미스(Debora Smith)의 The Vegetarian이었다. 당시 한강과 데버러 스미스는 이 소설로 인터내셔널 맨부커상을 공동 수상했다. 맨부커상 수상 소식을 듣는 순간 호기심이 일었다. 무엇이 이 소설을 매력적으로 만들었을까? 무엇이 그 명망 높다는 맨부커로 하여금 이 소설을 선택하게 한 것일까? 맨부커상은 노벨문학상, 프랑스의 콩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번역가답게 대번 번역으로 관심이 쏠렸다. 그동안 읽었던, 아니 분석했던 한영소설들은 지극히 한국적이었다. 소설은 한국인의 감성을 바탕으로 쓴다. 그 번역들은 한국인의 감성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었으므로, 말하자면 원본 문화를 중시한 번역이었으므로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인이 이해하는 번역, 한국 문화가 고스란히 녹아든 번역, 그러므로 영문번역도 다를 것 없었다. 그런데 상을 받다니. 그것도 세계 삼대 문학상 중의 하나인 맨부커 상이라니. 그만큼 한국인의 정서가 널리 알려진 것일까. 혹은 한국문화가 그만큼 알려진 것일까. 그도 아니면 혹자가 거론하는 대로 국력이 신장한 것일까.
일반적으로 번역가는 감추어진다. 어떤 상을 받으면 화려하게 각광을 받는 사람은 작가지 번역가가 아니다. 물론 작품을 쓴 사람이 작가니 당연한 일이지만 번역이 없으면 작품이 아무리 좋아도 국내로 한정되고 만다. 찻잔 속 태풍은 찻잔안에서만 태풍이다. 『채식주의자』, 정확히 말해 이 소설 내의 「몽고반점」은 2005년 국내에서 명망 높은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그러므로 문학적 가치는 이미 보증된 상태였다.
이 책의 번역가는 유명하거나 명망 높은 학자가 아니었다. 아주 새로운 얼굴, 데보러 스미스(Debora Smith)라는, 스물 여덟 살의 젊디젊은 학생이었다. 한국어를 독학으로 시작했고, 한국학을 공부한지 겨우 6년밖에 되지 않은 박사과정생. 그런데 국제 맨 부커 수상위원회는 이 젊은 여인에게 작가와 공동으로 상을 주었던 것이다. 신선한 발상이었고 눈이 번쩍 뜨이는 소식이었다. 번역가들의 노고를 인정한다는 의미였으므로. 스미스는 International Man Booker가 제정한 공동 상을 처음으로 수상한 번역작가였다. (저자와 번역작가가 £50,000를 반으로 나누어 가졌다.)
번역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누구나 안다. 세계로 나가는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것이다. 번역은 단순한 어휘의 문제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는 축자역(흔히 말하는 직역) 대 의미를 살려 번역하는 의역이라는 용어는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하지만, 번역한 책을 읽는 독자, 대상 독자의 문화적 배경은 그다지 거론되지 않는다. 뭉뚱그려 의역에 포함하는 탓이다. 의역에는 대상 독자의 전통, 사고방식, 문화적 배경에 단어가 지닌 언어의 역사 및 사건 등을 고려한 번역이 포함된다. 결국 서양인의 사고방식과 한국인의 사고방식이 다르므로 한국인 독자가 이해하는 만큼 서양인 독자가 이해하도록 하기가 어렵다는 의미다. 채식주의자 번역과 관련해서는 흔히 자국화와 이국화가 거론된다.
자국화란 번역서를 읽는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여러 요소를 바꾸거나 삭제하거나 혹은 무시하는 방식으로 번역하는 번역전략이다. 한국어 책을 읽고 한국인이 갖는 이미지를 영어를 읽은 서양인이 동일하게 떠오르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건 골치 아픈 문제다. 문화가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른데 어떻게 동일한 이미지를 갖도록 할 수 있는가. 그들의 사고방식의 결을 따라가야 한다는 의미다. 서양인의 사고방식과 한국인의 사고방식이 다르므로 한국인 독자가 이해하는 만큼 서양인 독자가 이해하도록 하기가 어렵기에 이러한 전략들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제각기 장단점이 있다.
The Vegetarian과 『채식주의자』를 비교하는 일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물론 원본과 번역본의 차이는 미묘했지만 그간 분석해왔던 유수의 한영번역소설과는 달랐다. 우리식 번역으로는 뛰어넘기 힘든 부분을 열어젖히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서양인의 사고방식을 고려한 번역이었다. 오독이라고 보아야 할까. 혹은 착각이라고 보아야 할까. 아니면 고의적인 편집이라고 보아야 할까. 번역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소설은 한국인이 아닌 서양독자를 고려해 번역되었다.
말하자면 철저히 대상독자에게 잘 읽히기 위한 번역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채식주의자」 회식 부분에서 사장이 말하는 ‘사상 체질’은 ‘네 개의 철학 이념’ 정도로 번역되었다. 그런가 하면 스미스는 친척관계를 번역하는데 서툴렀고 회식 같은 곳에서 드러나는 한국인 특유의 분위기를 읽어 내는 데 서툴렀다. 한국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대목이었다. (후에 60여개의 오역을 수정했다고 한다.)
따라서 The Vegetarian을 분석한 한국인 학자들은 그녀의 번역상 오역을 지적하면서 다양한 평을 내놓았다. 학자들 대다수의 목소리는 그녀의 번역이 독자 친화적이고 수용자 중심적인 번역 전략으로 자국화 전략을 택했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두 개의 『채식주의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스미스는 새로운 작품을 창작했다는 것이니 원본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스미스의 번역이 유려하고 뛰어나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런가 하면 스미스가 감으로 번역했기에 좋은 번역이 나왔다고도 한다. 결정적인 것은 맨부커상이건 노벨상이건 수상위원회가 읽는 것은 원본이 아니다. 그들은 번역된 작품을 읽는다.
또 하나 스미스는 자신이 번역한 작품을 출판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혹자는 그녀가 대산문화재단에서 기금을 받았기 때문에 번역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기관의 기여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번역작품을 출간하는 것은 번역자의 몫이다. 책을 출간해줄 출판사를 섭외해야 하는 것이다. 스미스는 포르토벨로 출판사에 이 작품을 들고 갔고 편집자 맥스는 책을 읽어본 후 출판 결정을 내렸다.
여기에는 한강의 작품을 미국의 여러 출판사에 보냈던 한국 에이전시의 노력은 나타나지 않는다. 당시 포르토벨로의 편집자였던 맥스는 2013년 런던 북 페어에서 데보러 스미스와 만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에이전시의 노력을 언급한다. 당시 그는 전혀 몰랐지만 한국 에이전시가 미국의 여러 출판사에 출판을 제안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는 것이다. 미국 뉴욕에서 소규모 문학 에이전시를 운영하는 지트워는 2006년 전 한강 작가의 한국 에이전시인 이구용 KL매니지먼트 대표에게서 '채식주의자'를 받아 읽어보고 금세 사랑에 빠졌지만, 출판하지 못했다고 한다. 미국 로체스터 대학의 비영리 문학 출판사 오픈레터는 '채식주의자' 영문본 출판 제안을 거절했다(머니투데이 2024. 10. 15).
The Vegetarian 의 출판은 아마도 맥스가 문학 번역 출판 전문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그리고 이 출판사가 독립출판사였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이 책의 7페이지를 읽었고 그리고 출판사의 다른 사람들과 의논했으며 이 책의 가치를 인정했다. 그는 번역이 매우 훌륭하고 유창하며 분위기가 있었고 음악성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 이 책이 영국에서 출판되었던 것이다.
영미출판계에서 번역서를 출판하는 비율은 전체의 3프로다. 그 희박한 확률에 당첨된 것이다. 이 작품을 맨부커 상 위원회가 눈여겨보았다. 이 상은 영국에서 영어로 번역 출간된 단행본 소설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 다음은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다. 한강은 노벨상을 탔다. 그리고 그녀의 책이 지금 독서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부디 그 열풍이 지속되기를 빈다.
<채식주의자>의 영어 번역과 관련해 한강은 “소설에서는 톤 그러니까 목소리의 질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그런 점에서 데버러 스미스의 번역은 작가인 제가 의도했던 톤을 정확히 살렸다”고 평가했다(한겨레 2019.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