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정의하는 순간 그 속성이 내게 심어진다
생은 과일처럼 익는다
이기철
창문은 누가 두드리는가, 과일 익는 저녁이여
향기는 둥치 안에 숨었다가 조금씩 우리의 코에 스민다
맨발로 밟으면 풀잎은 음악 소리를 낸다
사람 아니면 누구에게 그립다는 말을 전할까
불빛으로 남은 이름이 내 생의 핏줄이다
하루를 태우고 남은 빛이 별이 될 때
어둡지 않으려고 마음과 집들은 함께 모여 있다
어느 별에 살다가 내게로 온 생이여
내 생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구나
나무가 팔을 벋어 다른 나무를 껴안는다
사람은 마음을 벋어 타인을 껴안는다
어느 가슴이 그립다는 말을 발명했을까
공중에도 푸른 하루가 살듯이
내 시에는 사람의 이름이 살고 있다
붉은 옷 한 벌 해지면 떠나갈 꽃들처럼
그렇게는 내게 온 생을 떠나보낼 수 없다
귀빈이여, 생이라는 새 이파리여
네가 있어 삶은 과일처럼 익는다
현대문학 / 2013년 9월호
매발톱씨앗을 거두었습니다. 며칠에 걸쳐 조금씩 거두었습니다. 어느 한 날에 거둘 수 없는 것이 이 씨주머니는 익고 저 씨주머니는 덜 익어서 한 번에 거둘 수가 없더군요. 씨주머니가 익으면 노란색으로 변하면서 바짝 마릅니다. 그러면 종처럼 생긴 씨주머니는 툭하고 떨어지게 되고 여지껏 소중하게 품고 있던 씨앗이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씨앗은 깨알보다도 작습니다. 씨주머니가 품고 있던 검은 씨앗을 하나씩 주워 종이봉투에 갈무리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생 전체가 기다림으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씨앗은 꽃이 져야 생겨나고 꽃은 잎사귀가 있어야 씨앗을 맺을 영양을 얻습니다. 잎사귀는 뿌리가 있어야 설 힘을 가집니다. 꽃이 먼저건 잎사귀가 먼저건 줄기와 뿌리와 씨앗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 모든 것이 기다림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뿌리는 땅속에서 어둠을 견디고 줄기는 땅 위에서 비와 바람을 그리고 추위와 더위를 견딥니다. 잎사귀는 벌레를 견디고 하늘을 견디고 달빛과 별빛을 견딥니다. 견딘다는 것은 그 말 자체가 고통을 품고 있습니다. 작건 크건 어느 것에건 견딘다는 것은 내 것이 아닌 다른 것에 적응한다는 것으로 나를 내어주고 너를 내것으로 한다는 의미입니다. 견디고 난 다음에 오는 것은 꽃과 열매, 그러므로 서로는 서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간 또한 동일한 과정을 거칩니다. 기다린다는 말을 하는 것은 곧 그립다는 말을 하는 것과 동일하지요. 대상이 있어 기다리고 그 기다림은 대상에 대한 그리움으로 연결되지요. 두려움, 불안 또한 기다림이 없으면 오지 않는 것이지요. 슬픔은 지나간 일에 대한 것, 원망과 기쁨 또한 지나간 일에 대한 것, 어느 가슴이 그립다는 말을 발명했을까라는 의문은 생에서 솟아납니다. 화자가 말하는 사람의 이름이란 누군가일수도 있지만 생을 사는 모든 이에 관한 것일테지요. 기다리는 모든 사람, 견디는 모든 사람,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는 그 모든 이에 대한.
기다림은 곧 숙성입니다. 내게서는, 당신에게서는 어떤 향이 나는지요. 그 꽃을, 그 과일을 말하는 순간 당신 안에서 씨앗이 자라기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는 그 꽃을, 과일을 키워갈 겁니다. 내가 나를 정의하는 순간 나는 그것의 속성을 내 안에 품고 있는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