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아디
송원장은 두 팔을 깍지 낀 채 텅 빈 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원장실, 주사실, 간호사실, 그리고 입원실 칸막이를 전부 뜯어내고 나니 그야말로 운동장같이 너릅니다. 느티나무가 긴 그늘을 만들고 그 속에 살고 있던 매미 소리도 함께 와르르 쏟아지던 어린 시절의 운동장 같았습니다.
다시 오른손을 왼쪽 팔꿈치에 대고는 왼손으로 턱을 바치며 고개를 끄덕거립니다.
“그래, 이제부터 시작이야.”
유리창 틈새로 들어온 햇살이 여러 개의 선을 그려 놓았습니다. 그 사이로 송원장은 두어 걸음 천천히 걷다가 창을 가만히 열었습니다.
그 새가 보이지 않습니다.
송원장의 마음을 바꾸어놓은 박새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평소 바깥을 잘 내다보지 않던 송원장이었습니다. 우연히 블라인드를 올리고 창밖을 내다볼 때였습니다. 삐쭉 큰 미루나무 가지 위에 박새가 한 마리 앉아있었습니다. 뒷덜미가 노란 작은 몸집의 박새는 쉬지 않고 재재거렸습니다. 송원장에게 계속 무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
차트를 가지고 들어오던 간호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습니다.
“원장님, 전 아무 말씀도 안 드렸는데요.”
“으응, 저 새보고 한 소리야.”
“아이, 원장님. 농담도 할 줄 아시네요.”
평소 유머도 모르고 지시만 하던 송원장이었습니다.
재재거리는 박새 소리는 쉽게 블라인드를 내릴 수 없게 했습니다. 새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맑아지고, 어린 시절이 떠오르며 마음까지 편안해졌습니다. 괜히 장난기가 올라 손뼉을 쳐서 후려쳐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박새는 날아가지 않고 계속 재재거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행복은 무엇일까?”
병원과 집 밖에 모르던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그 후 창밖을 내다보는 시간이 잦아졌고 퇴근하면 옥상으로 올라가 고개가 아프도록 별도 세어보았습니다.
“지나간 시간은 할 수 없지만 지금부터라도 잘살아 보자.”
그래서 송원장은 의사 폐업 신고를 냈습니다. 미련 없이 흰 가운을 벗기로 했습니다. 특별히 몸이 아프거나 의사 일을 못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저 창밖에 지저귀던 박새 한 마리가 송원장을 바꾸게 한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몇 날을 토라져서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꼭 쥐고 있던 풍선을 놓쳐버렸을 때의 허허함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날아갈 파랑새입니다. 새처럼 훨훨, 구름처럼 둥둥, 바람처럼 휙휙 자유로워지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2층은 전세를 내도록 하겠어요.”
송원장은 머리를 가로저었습니다.
“아니? 그 넓은 곳을 그냥 묵힌단 말이요. 한 달에 돈이 얼만데…….”
아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벌만큼 벌어다 주었잖소, 나도 내 마음대로 살아볼 거요.”
“여태 잘 살아왔잖아요. 더 이상 어떻게 잘 살아요!”
“당신만 잘 살았지, 난 아니었어.”
송원장은 빙긋 웃으며 아내에게 다짐하듯 말했습니다.
“2층은 나 혼자 쓸 테니, 함부로 들어오지도 말고 그대로 두시오.”
아내는 입을 비쭉거리며 ‘쿵쿵’ 발소리를 내며 3층으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의사 일을 할 때는 하늘은 없었습니다. 일어나면 바로 병원으로 들어가 온종일 환자만 보았습니다. 환자들이 많을 때는 점심도 거르고, 늦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였습니다. 퇴근하면 바로 3층으로 올라가 씻고 자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학회에 가면 만나는 동료 의사 외는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잊어버렸습니다.
그런 세월은 송원장의 맑은 눈빛을 쌀뜨물처럼 만들었고, 반짝거리던 머리칼은 어느새 하얗게 눈이 쌓였으며 팽팽하던 피부는 축 늘어져 군데군데 검버섯이 피었습니다.
운동장 같은 병원을 한 번 둘러본 송원장은 미리 사둔 자물쇠로 문을 채웠습니다. 그리고 열쇠를 한 번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가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습니다.
겨울이었지만, 햇살은 따뜻했습니다.
이 시각에 하늘과 해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송원장은 행복했습니다. 잔잔한 웃음이 입가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옷을 벗어버린 겨울나무가 송원장이 벗어버린 흰 가운처럼 홀가분해 보였습니다. 누가 겨울나무를 춥고 외롭다고 했습니까? 잎을 떨어내 버린 겨울나무가 시원하게 놓아버린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하면서 두 팔을 흔들며 걸었습니다. 휘파람이 절로 나왔습니다.
송원장은 버스를 탈까 생각하다가 전철역까지 걷기로 했습니다. 세 구역을 가야 하는 거리였지만 송원장은 바퀴가 달린 신을 신은 것처럼 신났습니다. 마음이 꽃밭이니 몸은 마치 나비가 된 것 같았습니다.
양 길가에 펼쳐져 있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누런 상자 안쪽을 오려서 붉은 매직펜으로 쓴 서툰 글씨도 재미있었습니다.
“한 켤레 500원”
양말이 한 켤레 오백 원이라고 합니다. 뒷짐을 지고 한참 고개를 내밀고 있으니, 아주머니는 송원장 코앞에다 양말을 들어 올렸습니다.
“이런 것 어디 가서 살 수 있나 둘러보세요. 목도 잘 늘어나지 않고 색깔도 여러 가지예요. 천 원에 세 켤레 드릴 게요.”
송원장은 천 원을 주고 양말이 든 검은 봉지를 흔들며 흐뭇한 미소를 띠며 걸었습니다.
알록달록 모자가 줄줄이 걸려있는 리어카도 만났습니다. 선글라스에 빨간 모자를 쓴 젊은 남자는 기웃거리고 있는 송원장의 머리 위에 노란 모자를 폭 씌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작은 손거울을 건네주면서 말했습니다.
“아주 멋집니다. 하나는 삼천 원, 두 개는 오천 원. 이것은 등산 갈 때, 요것은 데이트할 때, 골라 골라 있을 때 사세요.”
송원장은 모자를 눌러쓰고 이리저리 거울을 보았습니다. 개구쟁이 청년이 거울 속에서 빙긋 웃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작고 귀여운 라디오가 나란히 줄을 지어있는 곳에 눈길이 갔습니다.
“자. 수출품입니다. 백화점에 가면 오만 원, 여기서는 단돈 만 원입니다, 만 원!”
송원장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옛 노래에 귀를 기울이다가 또 사서 허리춤에 차고는 걸었습니다. 한 번씩 비닐봉지를 들여다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점심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송원장은 배도 고프지 않았습니다. 평생 물건을 사본 적이 없는 송원장은 마치 보물을 얻은 것 같았습니다.
이윽고 전철역이 보였습니다. 늙는 것도 그렇게 나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노인을 우대한다는 좌석은 그대로 비어있었습니다. 송원장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조심스레 앉았습니다. 데워진 공기가 뒷다리 쪽에서 솔솔 기분 좋게 뿜어 나왔습니다. 잔소리하는 아내도 없고 진료를 해야 할 환자도 없습니다. 그저 앉아서 마주 보이는 사람들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싱겁게 웃어보기도 했습니다. 뒷다리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가 마음까지 데워주면서 스르르 잠이 쏟아졌습니다. 몇 번이나 문이 열렸다가 닫혔는지 모릅니다.
마지막 역에 닿자, 다시 반대편으로 가서 갈아탔습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배가 고프기도 하고, 오늘 산 것을 빨리 집에 가서 입고는 산으로 갈 생각입니다. 작고 예쁜 라디오는 주머니에 차고서 말입니다.
계단을 오르는데 절로 콧노래가 나왔습니다. 텅 비어 있을 운동장 같은 보금자리를 그리며 문을 열었습니다.
“아니?”
언제 채워졌는지 창문까지 막아버린 높은 장식장에는 갖가지 상패와 책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천장에서부터 내려온 화려한 불빛이 비싼 가죽 소파 위로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드레스를 입고 왕후가 된 것처럼 앉아있었습니다.
“당신을 위해 준비했어요. 멋지게 꾸며주고 싶었다고요.”
송원장의 얼굴은 사온 양말 색보다 더 울긋불긋해졌습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검은 비닐봉지가 반짝이는 바닥으로 툭 떨어졌습니다.
“아니, 이런 싸구려들을 어디에 쓰려고 사 온 거예요!”
아내는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것을 들춰내 보고는 소리쳤습니다.
송원장은 말없이 돌아서 다시 길로 나왔습니다.
허리춤에 찬 라디오 소리를 높이며 걷기 시작했습니다.
“…… 인도말로 ‘아디’는 시작을 의미합니다. 즉 ‘잡다’라는 뜻을 가졌지요. 시간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디서부터 잡느냐에 따라 그때부터 시간이 존재하게 된답니다. 혹시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임을 아신다면 여러분, 지금부터 ‘아디’입니다.”
저녁 햇살이 만든 그림자가 송원장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