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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수자 Apr 19. 2024

어른을 위한 동화 10선

 4화 시간 여행

  오랜만일세.

  자네에게 편지를 써 본 날이 몇 년만인가? 내가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서울서 공부하고 자넨 고향에서 사범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종종 편지를 했었지.

  그런데 편지를 나눈 지가 강산이 변한다는 십 년을 세 번이나 넘겼구나.

  서운하겠지만, 난 그동안 고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자네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네. 고향에 내려가도 자넬 볼 시간도 없었지.

  그런데 며칠 전에 잊고 있었던 고향집과 친구가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음을 발견했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의사란 직업이 항상 바쁘지 않은가? 남들처럼 변변한 휴가 한번 제대로 가 본 적도 없고, 고향집도 일 년에 한 번도 찾아보기가 힘들어. 급한 환자들이 언제 들이닥칠 줄 모르니까, 물론 나 외에 열 사람의 의사가 있긴 하지만 원장인 내가 자리를 비울 수가 없지.

  그런데 그날은 참 이상했어.

  하늘을 쳐다볼 겨를도 없는 내가, 아니 그런 생각도 없었던 나였는데 창밖으로 들어온 가을 하늘이 너무나 맑고 아름다웠어.

  난 가운을 벗고 웃옷을 입었지.

  그날따라 환자도 많지 않았다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병원 밖으로 나왔어.

  아름다운 가을 하늘이 날 불러내었으므로 한 번씩 하늘을 올려다보며 걸었지.

  무척 상쾌한 기분이었어, 오랜만에 휘파람까지 불면서 걸었다네.

  바람도 적당하게 불었고, 먼 산 밑에는 울긋불긋 물든 단풍도 보이고, 가로수의 은행잎도 노란 옷으로 갈아입고 있는 멋진 날이었지.

  얼마나 걸었을까? 정류소에 버스 한 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네.

  ‘108번?’

  단풍잎처럼 붉은 색깔의 버스였는데, 뒷모서리엔 노란 글씨로 108번이라고 씌어 있었어.

  자네와 내가 읍내 중학교로 통학할 때 탔던 버스번호도 108번이었음을 기억하지? 난 반가워서 얼른 올라탔다네.

  버스 안에는 사람이 얼마 없었어. 그 옛날 콩나물시루 같았던 모습이 아니어서 퍽이나 다행이었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시각은 출퇴근 시간이 아닌 서너 시경이었거든.

  내리는 문 근처에 앉아서 난 차가 가는 끝까지 가 보려고 마음먹었다네.

  108번 버스는 도심을 지나고 산복도로를 오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 나도 모르게 벨을 급히 눌렀다네.

  운전기사는 정류소도 아닌 곳에서 벨을 누르는 날 반쯤 넋 나간 사람으로 여겼는지 계속 백미러로 흘긋흘긋 훔쳐보더니 다음 정류소에서 내리라고 턱을 들며 차를 세우는 것이었어. 그때는 사실 내리기 싫었는데 기사의 째려보는 눈을 보자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네.

  내가 내리자마자 108번은 날아가 버리듯이 ‘부르릉’ 소리와 함께 내 앞에서 사라져 버렸네. 난 그 기사가 원망스러워서 양손을 허리에 얹고 찻길을 노려보았지. 그런데 내 눈앞에 펼쳐진 모습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네.

  그 길은 고향 어귀와 똑같았네.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지고 가슴은 쿵쿵거리기 시작했다네.

  지나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모두 낯이 익은 것 같았어. 내가 미소를 보내자 그들도 웃어 주는 것 같았단다.

  내가 마을에 들어서자 놀랍게도 고향집 남새밭이 그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겠어. 천년을 늙어도 가락을 잃지 않는다는 오동나무 두 그루가 턱 버티고 있었는데 그것을 본 내 가슴은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두근거렸다네.

  남새밭에는 배추 한 고랑, 무 한 고랑, 조선 파도 파랗게 물결치고 있었고, 그 둘레에는 누런 호박이 두둥실 달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네.

  남새밭 사이로 보이는 반쯤 열린 사립짝에는 어머니가 빨간 고추를 따서 멍석 위에 말리고 있었는데, 그 옆에는 누렁이도 앉아서 지켜보고 있었고, 어머니가 쓴 낡은 수건 위에는 고추잠자리가 그림같이 앉아 있었다네. 어머니를 본 나는 반가움에 달려가 덥석 어머니 손을 잡고 싶었지만, 어릴 때처럼 어머니를 놀라게 해 주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이 나지 않겠나, 그래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네. 부엌에서 나온 누나가 보리쌀을 씻으러 우물 옆에 앉아서 하얗게 뜨물을 받아 내리고 있었고, 광에서 낫을 가지고 나온 아버지는 뜨물을 받아서 숫돌에서 반짝거리게 그것을 갈고 있었어.

  방에서 나온 까막아이 하나가 마당에서 누렁이와 장난을 치고 있었는데, 그때 내 기분이 좀 이상해졌어. 어디서 본 듯한, 아주 친한 동무 같기도 하고……. 아― 그 까막아이는 바로 나였어.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어머니가

  “영호야! 싸리비 좀 가져오렴.”

  그 소리에 까막아이가 나란 사실을 알게 된 거야. 난 깜짝 놀랐다네.

  산복도로에 있는 외진 집 근처에서 혼자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누나도 사라진 곳에는 낯선 할머니 한분이 나를 보고는 누굴 찾고 있느냐고 묻지 않겠나. 도심 속에서 아직도 옛집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는 할머니 손에는 빨간 고추가 몇 개 들려져 있었고, 저물어 가는 해님이 마지막 붉은빛을 고추 속에다 넣고 있었어.

  난 고개를 약간 숙여 인사를 하고 말했지.

  “할머니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보고 있었어요.”

  할머니는 별 싱거운 사람 다 봤다는 표정으로 날 한참 쳐다보더니 고추를 따서 앞치마에 담더군.

  돌아 나온 나는 찻길을 찾는다고 한참을 헤맸다네. 어디로 가야 병원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집으로 가는 방향까지 잃어버리고 말았다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피곤한 나는 병원으로 전화를 해서 기사를 내가 있는 곳으로 와 달라하리라고 공중전화 부수를 찾지 않았겠나. 그런데 전화번호를 도무지 기억을 할 수 없었다네. 신호가 가는 곳마다 다른 데가 나오고 모두 아니라는 거였어. 집에다 전화를 했는데 거기도 잘못 걸었다는 거야.

  난 미칠 지경이었다네.

  겨우 택시를 잡아 ‘회복병원’으로 가자고 했지. 그런데 택시기사까지 그런 병원 이름은 처음 들어본다는 거였어. 개인 병원으로는 이 고장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큰 병원을 운전기사가 모른다니 난 아득해졌어.

  차비는 얼마든지 줄 테니 찾아달라고 사정했지.

  그랬더니 자세히 날 보더니 차를 몰기 시작했다네.

  그제야 안심을 한 나는 창문을 열고 눈을 감았어.

  “다 왔습니다.”

  기사가 날 흔들어 깨웠어.

  바로 내 병원 앞이었네. 난 만원을 꺼내서 기사에게 주면서 말했지.

  “당신은 아까 ‘회복병원’을 모른다고 하더니 용케도 잘 찾았군 그래요.”

  기사는 어리둥절하면서 대답했어.

  “선생님이 탔을 때는 ‘망우리병원’이라고 해서 이상했는데, 주무시면서 잠꼬대를 하는 것을 들으니 ‘회복병원’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여기로 모셨습니다.”  

  난 차문을 닫아 주며 정말 고맙다고 인사했다네.

  내가 병원 안으로 들어서자 간호사들이 뛰어나오며 반겨 주었어.

  “원장님, 어찌 된 일이에요. 아무 말씀도 없이 나가셔서 이제야 돌아오시다니,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 무척 놀랐어요. 사모님도 원장실에 와 계시답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지.

  “응, 잠시 시간 여행을 갔다 왔지.”

  간호사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참 나를 보더군.

  원장실에 들어서자, 아내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지.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너무 놀랐어요.”

  “그래, 무슨 일이 있긴 있었지. 이번 일요일엔 골프 약속은 취소하고, 고향 부모님 산소에 가 봐야겠소. 동네 어른들도 찾아뵙고 친구도 좀 만나보고.”

  아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날 바라보더군.

  명절에도 잘 가지 않던 고향을 갑자기 간다고 하니, 아내도 무척 놀란 모양이었네. 자네가 준비 좀 해 주게. 이번 일요일에는 동네 어른들을 모셔 놓고 맛있는 음식과 술을 대접하고 싶다네.

  그동안 나는 돈을 벌 줄만 알았지 쓸 줄은 몰랐네.

  이번에 내려가면 고향 마을을 위해 좋은 일도 하고 싶어.

  공부를 더 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 진학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면 내 기꺼이 도와 주리다. 그리고 맑은 가을 하늘 아래 누워 계시는 부모님께 그동안의 불효를 용서해 달라고 진심으로 엎드려 빌고 싶네.

  항상 남을 위해 살라던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시어 손이라도 덥석 잡아 줄는지 아는가?

  그럼, 일요일에 만나세.


  맑은 가을날, 벗 문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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