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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마 May 24. 2024

퇴사의 이유 1. 경제적 자유를 꿈꾸다

그래,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요즘 유치원생의 용돈


유치원을 다니는 내 딸에게는 파란색 지갑이 있다.

유치원생이 얼마나 돈이 있을까 하겠지만 명절, 어린이날, 생일 등등 특정한 날 외에도 어린이의 용돈은 상상 이상으로 많이 생긴다. 물론 나중에 갚는 것은 다 부모의 몫이겠지만 뭐 현재로선 그 아이의 돈이 꽤 된다는 것이 놀랍다.


오늘은 아이가 보고 싶다던 뮤지컬을 예약했다.

항상 운전하고 가면 길가에 붙은 갖가지 어린이공연 플래카드를 보고는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아이였다.

바쁘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 지루할 것 같다는 짐작과 생각보다 비싼 공연비에 망설이던 나였다.

오늘은 모처럼 마음먹고 뮤지컬을 보러 가기로 결심하고 예약을 한다.

아이는 둘 중에 고민하고 있다.

티니핑과 에그박사 공연이다.

둘 다 보고 싶어 했지만 하나만 선택하라고 요구했다.

" 뮤지컬 공연은 비싸. 모든 걸 다 할 순 없어. 선택을 해야 해."

한참을 고민하던 아이는

"코카콜라 맛있다. 맛있으면 또 먹지.... 척척박사님에게 물어물어 봅시다 알라 뿅"

손가락으로 왔다 갔다 하더니 결국은 에그박사를 선택한다.

그러곤 네이버에서 예약을 하며 자리를 고르고 있던 아빠에게

"잠깐만" 하더니

파란 지갑을 들고 나온다.

"얼마야? 내가 줄게" 하면서.


종종 카페에 갈 때도

"오늘은 내가 살게."라면서

자기에게 초록색 만원이 제일 많다며 한 장을 꺼내오기도 하는데 오늘도 역시 이 꼬맹이가 돈을 쓰려는 상황이 너무 웃기면서 낯설다.


옛날 국민학생의 용돈
(라떼는 말이야)


왜 그런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이 아이만 할 때 용돈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국민학생이라 불리던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학교에서 준비물을 다 챙겨주지 않았다. 나는 필요한 준비물이 있을 때마다 사야 할 물건을 구체적으로 말하며 필요한 만큼의 돈을 얻어다 딱 그것만 샀다. 혹 어른에게서 받은 용돈이 있더라도 그건 엄마의 몫이자 가족 공동의 생활비로 쓰였었지 내 손에 남는 것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경제교육을 제대로 받은 기억이 없다.

돈에 대해 잘 몰랐고 학교에서도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이름 외에는 배운 적이 없었다.

어렸을 적에도 “우리 집에 돈이 얼마나 있어?”라고 물었지만 엄마는 얼버무리거나 다른 이야기로 돌리거나 몰라도 된다고 하셨다.

그렇게 돈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졌고 고만고만한 동네 안에서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첫 사회생활-돈벌이


하지만 내가 타지에 있는 대학에 가고 성인이라 할 수 있는 20살이 되고 나니 돈의 중요성을 조금 알게 되었다. 친구들과 모여 시내로 나가면 보세라고 하는 여러 옷집도 많고, 멋있어 보이는 카페도 많았다. 그러면 꼭 필요한 전공서적을 사는 데 말고도 돈이 필요했다. 고등학교에 가서야 조금씩 용돈을 받아 쓰던 나는 대학에 가서 첫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대학가 지하에 있던 나름 인기 있는 돈가스 가게였다. 주방에서 사장님이 튀긴 돈가스를 동그란 접시에 올리고 소스와 통조림 파인애플, 작게 잘린 조그마한 김치를 몇 젓가락 얹어 내거나 홀에서 서빙을 하는 일이었다. 간단하게나마 점심도 해결할 수 있고 돈을 받고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해주고 있다는 것이 꽤나 뿌듯했다. 그렇게 첫 달 월급 18만 원을 받았다. 첫 사회생활로 받은 그 월급은 고스란히 전부 엄마에게 드렸다. 엄마는 아직도 가끔 그때를 눈물겨워하신다.

그 후 같은 과에 언니들은 과외라는 것을 해서 시간당 더 많은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다른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전단지를 붙이고 나를 알리고 일을 구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과외를 시킬 정도의 학구열을 가진 집이라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바로 시작하는 것도 아니고 첫 수업받는 과정을 지켜본 후 과외가 성사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보다는 훨씬 나은 보수를 받으니 내가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방학 때도 집에 내려가지 않고 과외를 하기도 했다. 기숙사에 살던 1, 2학년 이후로 자취생활을 하면서 월세는 꼬박꼬박 내야 하니 방학 때 집을 비워두는 것이 오히려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던 과외를 쭉 이어서 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된 나는 여기저기 써야 하는 돈이 많았고, 대학 4년 동안 남는 돈은 없었다. 이후 넉넉지는 않지만 따박따박 급여를 받는 월급쟁이로 지내며 16년의 시간이 그저 흘러갔다.


퇴사했지만 경제적 자유를 꿈꾼다.
아니, 퇴사를 했기 때문에 경제적 자유를 꿈꿀 수 있다.

이제 나는 퇴사를 하고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에 몸을 실었다. 내가 꾸는 꿈은 나의 월급쟁이 현실로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겸직이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지금은 경제 관련 예능이며, 유튜브며 정보가 넘치다 못해 도대체 뭘 걸러서 봐야 할지 모르는 세상이 되었다. 내가 알고자 한다면 무엇이든 알 수 있다. 무엇이든 해볼 수 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수많은 정보 덕에 그때보다 조금 더 경제에 대해 많이 알게 되면서 왜 대학생 때부터 진즉에 주식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왜 그때 경제 관련 책을 보지 않았을까 후회를 한다. 하지만 아는 게 있어야 후회도 하고 안타까움도 남는 법이다. 그 당시로 돌아간대도 나는 똑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일 것이다.     


이제 막 만 40세가 된 나는 부자를 꿈꾼다.

사실 딱히 명품에는 관심이 없다. 물론 그쪽 세상을 아예 모르니 갖고 싶은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부자가 되고 싶은 이유는 딱 한 가지다.

내 아이가, 그리고 우리 가족이 정말 원하는 것이 있을 때 돈이 그 선택을 좌지우지 결정하게 되지 않는 것.

유학을 가고 싶다거나 아니면 사소한 물건을 살 때도 꼭 갖고 싶은 것을 두고 비싸니까, 돈이 없으니까 다른 건 어때?라고 말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게 바로 경제적 자유 아닐까. 선택이 자유로울 수 있을 정도로 돈이 있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하는 부자다.


나는 경제 공부에 대한 필요성을 너무 늦게 깨달았지만, 유치원생인 아이에게는 파란 지갑의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하나씩 차근히 알려줄 것이다.

돈을 모으고 쓰고 투자하는 많은 방법, 내가 알고자 하면 찾을 수 있는 정보, 알려주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에 산다는 것이 정말 감사한 요즘이다.


아이를 위해, 우리 가족의 더 나은 선택과 행복을 위해 부자가 되고 싶다.



“이거는 아빠가 보여줄게. 지갑은 넣어둬”

뮤지컬을 예약하는 아이 아빠 옆에서 소심하게 한마디 거든다.

“나도 에그박사가 좋더라.”


‘나중에는 꼭 보고 싶은 거 다 보자. 엄마가 잘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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