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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스톰 Jul 12. 2023

사랑은 눈으로 오느니

폭풍의 브랜드 도전기 Ep. #06 상상력 너머의 세계




사랑은 눈으로 온다고 했던가?



화장품을 대할 때 사람들은 멀리서 보고, 다가가 집어 들고, 향을 맡고, 발라보고, 마지막에서야 효능을 느낀다. 소비자들은 이 순서대로 느낌이 오는데 그중 시각이 제일 먼저다.


화장품을 만들어오면서 비주얼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제품의 효능과는 별개로 첫인상에서 밀려 소비자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사라지는 브랜드들을 너무나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제형을 고민하고 고민하여 만든 만큼 디자인과의 밸런스도 중요했다.


우리에겐 H 실장이 있었다. 몇 건의 개발 프로젝트를 함께 하면서 우리와 호흡을 맞춰왔다. 클라이언트의 생각과 방향성을 읽고 상상력 저 너머의 것을 구현해 주는 그녀는 능력은


탁.월.했.다.


고맙게도 이번 프로젝트도 기꺼이 함께 해주었다.





나는 제일 먼저 '발굴과 해독'이라는 책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고대 상형문자와 돌에 새긴 역사의 이야기가 들어있었다.


신화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우린 지구의 온기와 생명의 탄생을 말하는 브랜드이다. 그 탄생의 전설을 적은 최초의 기록인 신전의 돌판과 기둥. 그 모티브를 디자인에 새기고 싶었다.

  

[ 발굴과 해독  C.W.세람 │ 오흥식 옮김 ]



'사진에 있는 고대 신전의 글자체를 디자인에 넣고 싶어요.'


나의 주문은 간단했으나 그녀는 이걸요? 제가요? 왜요?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다음 날부터 그녀는 누구보다도 충실하게 그 작업을 수행해 나갔다.


그녀가 말했다.


'BAHAAR보다는 BAHAR 가 낫지 않아요?'


폰트를 포함한 BI, CI 시안을 여러 번 바꾸어 보다가 그녀는 글자의 균형을 이야기했다. 디자인의 균형상 AA보다는 A가 더 낫다고 했다. 나로서는 소비자에게 BAHAAR를 설득시키는 것이나 BAHAR를 설득시키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BAHAAR는 BAHAR가 되었다.



디자인의 균형이 단어의 의미를 눌렀다.


나로선 중요한 결정이었지만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아니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러했다.






제품 디자인의 실체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선 우리는 사무실 책장 선반 한 칸을 비우고 명품 화장품들로 채웠다. 그리고는 그 옆에 슬며시 우리 디자인 시안을 올려보았다. 우리 아이들은 해외 백화점, 면세점에서 이런 아이들과 경쟁을 해야 하니까.


명품 브랜드의 기에 눌려 주눅 들어 보이면 탈락,

단상자의 선과 여백이 어색해 보여도 탈락,

신선해 보이지 않아도 탈락,

물론 우리의 시그니처 레드의 색감도 계속 조정해 나갔다.


이게 다 같은 색이 아니라고





이 과정을 무수히 반복했다.

마침내 그 줄에서 어색해하지 않는 한 아이를 발견했다.

당당하게 선 모노리스.


너다......

 

Utah monolith  [출처 : 위키피디아]


이제는 향을 디자인해야 했다.



조향은 특급호텔의 시그니처 향을 만드는 영국의 프레그런스하우스 C사와 협업했다. 그들은 같이 일하기에는 제약이 많았으나 정교했다.


인공향은 배제, 한 가지 원칙이었다. 아무리 향료 기술이 발달해도 인공향이 천연 아로마가 주는 부드러움과 깊이감을 넘어설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범위를 넓혀 전 세계에서 가장 순수한 천연 에센셜 오일을 선별하는 것으로 향 디자인을 시작했다.


깊은 숲의 숨결, 그리고 히노키의 평온함을 담고 싶었다. 단순한 '향'이라기보다는, 공간을 지배하는 디자인처럼 함께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줄 '무드'를 지향했다. 향의 허리를 맡은 우디향은 금세 잡혔다. 히노키가 문제였다. 편백향은 균형을 다. 너무 강한 탓이었다.


먼 거리를 오가며 샘플이 날아다녔다. 조향 샘플은 한번 수정할 때마다 2주 이상이 소요되었다. 실험과 수정의 반복을 10개월 이상했다.


천연 에센셜 오일 6가지를 조합하여 우리가 원하는 향조에 다다랐다. 마지막 한 가지 오일(비밀)은 전혀 의외였는데 우리가 원하는 히노키의 은은함을 정확히 구현했다. 만족스러웠다.


그리고는 탑에서 먼저 올라오는 뾰족한 향을 깎아냈다. 내 앞 스쳐 지나가는 여인의 향이 너무 진하게 느껴지지 않기를 바랐다. 문득 뒤돌아보게 만드는 여운만 남기기를 원했다.



이제 노출 하나도 없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여인과도 같은 무드가 완성되었다. 눈으로 보이는 용기 디자인, 우리만의 시그니처 무드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갈 포뮬러가 모두 준비되어 2023. 02월 제품이 생산에 들어갔다.





모르는 바다로 들어가게 된 선장처럼 머릿속이 무거워졌다.

마케팅과 세일즈의 바다였다.



m  a y  d a y ......

m ay da y ......






<3줄 요약>
1. 디자인이 최우선이다. 나의 생각을 읽어줄 디자이너가 있는가? 쉽지는 않지만 만들어보자.
2. 어떻게든 디자인은 나온다. 그러나 거기에 우리의 지향점이 반영되게 하는 것은 완전 별개.
3. 디자인 같은 감성의 영역에서는 우리의 생각이 확고할수록 디테일은 깊어지나 시행착오가 적다. 일이 많아져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화를 덜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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